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 Sep 17. 2022

메말라 가는 개업 축하 화분

생명을 주고받는 일에 관해

버스 정류장 앞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새로 개업했다. 파란색 빵집은 노란색 카페로 뒤바뀌었다. 커피로 아침을 깨우는 사람들 때문에 출근 시간마다 분주하다. 좁은 인도에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뒤엉켰다.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메마른 화분들이 보였다. 길가에 있는 유리창 너머 화분 세 개가 나란히 놓였다. 각기 다른 식물이 키가  순서로 서 있었다.


화분에 심어진 식물에서 초록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눈에 봐도 바짝 말라 메마른 모습이다. 축 쳐진 잎사귀 툭 건들면 우수수 떨어질 듯하다. 마른 잎들이 간신히 줄기를 붙들며 매달려 있다. 곧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흙 위에 마른 잎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것일까. 식물이 지닌 특유의 생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사막을 연상시키는 황토색 잎들이 무덤을 이루었다. 화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식물은 스스로 삶을 멈춰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고엽으로 뒤덮인 화분에서 남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금빛띠를 두른 분홍 리본이 앙상한 가지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개업을 축하하고 사업 번성을 기원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 문구를 보고 나서 이 화분들이 개업 축하로 카페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햇볕에 반짝이는 것은 푸른 잎이 아니라 금빛 리본이었다. 그 리본은 식물의 죽음을 조의하기 위해 걸려있는 것일까. 사업 성공 기원의 상징이던 선물이었을 텐데... 어쩌다 저리 바짝 말라가는 신세가 되었는지 식물들의 사정이 딱했다. 화분 뒤로 박스들이 쌓여 있고 밀려드는 주문에 분주히 움직이는 직원들이 보였다. 어느 누구도 죽어가는 화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처참한 식물들을 보니 마음 한편이 아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카페에 들어가 화분에 물을 주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음과는 달리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화분의 생사에 내가 관여할 권리는 없었다. 화분의 식물이 죽던 살던 내가 물을 주거나 요구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식물이 죽어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 일로 나는 화분의 소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화분은 오로지 물을 주는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화분의 주인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관심을 주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이 없다. 화분에 갇혀 버린 식물들은 스스로 물을 찾으러 움직일 수 없다. 물을 달라고 보채거나 표현할 수 없는 식물들은, 그저 물 한 방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다 결국 생명수를 마시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다.


살아있는 생명을 쉽게 주고받는 모습이 이런 결말을 만든 것은 아닐까. 개업 축하를 위해 화분을 선물할 이유가 무엇인가. 축하 문구가 적힌 리본을 과시하기 위함인가. 개업 가게를 꾸며줄 인테리어 용도인가. 그러기에는 희생되는 생명의 삶이 안타깝지 않은가.


누군가는 생명을 소홀히 다루는 기분이라 살아 있는 마리모가 아닌, 마리모 인형을 선물한다고 했다. 숨을 쉬는 생명을 주고받는 일에는 항시 경계를 해야 한다. 자신도 가꾸기 버거운 현대인에게 살아있는 식물보다는 무생물의 선물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 축하하는 마음을 전할 방법은 다양하다. 인테리어나 축하 문구를 적기 위해 식물을 이용할 이유는 없다. 어딘가에서도 축하 문구를 달고 말라가는 식물을 떠오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는 항시 경각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전 14화 출근 한 시간 전에 향하는 곳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