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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Feb 08. 2022

계절 예찬

가을 : 신의 객기를 사랑하다.

가을이 왔다는 건 어쩌면 조금은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뒤란의 감을 단속한다거나 말라가기 직전의 대추를 거둬들이는 일처럼, 혹은 아침 녘에 서둘러야만 해낼 수 있는 농가의 잡일처럼 말이다.

 

가을이 깊어진다는 건 어쩌면 또 조금은 멋진 일일 수도 있겠다. 가로수의 은행나무가 열매도 없이  물들어가기 시작할 즈음, 순번을 정하지 않았던 탓에 중구난방으로 들쭉날쭉 제멋대로 노랗게 물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해 여행길에서 본 호수의 낮은 수면으로 반추되는 붉은 단풍과, 그 위로 솜사탕처럼 뭉그러진 연분홍의 노을을 살포시 껴안은 석양은, 슬프고도 멋진 가을과 퍽이나 잘 어울린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은 또 이 자리인 것을, 짧다고 아쉬워하며 맞이한 새 가을이 어디 지금 뿐이겠냐마는, 샛노랗다거나 새빨간 것들이 자아내는 슬픔과, 조금 멋짐에 대해 오늘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신록이 짙푸르러 지는 초여름 날의 대기와 햇빛과, 버석거리는 습한 구름이 총총대는 오뉴월의 석양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던 날엔 그랬다.

인생에 있어서 청년기를 초록의 나뭇잎에 비유하는 게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굳이 계절로 비유하자면 초여름이겠지.

결코 미숙한 계절은 아니지만, 늦가을이라던가 한겨울이라는 표현보단, 초여름이라는 표현이 맞춤하다.

그렇게 어김없이 초여름이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여름을 넘어선 가을이 남다르게 와닿았다.

자지러지는 매미소리가 점차 스러져 가고, 천변의 귀뚜라미 소리가 애달퍼지기 시작하면서 계절의 중첩을 애매하게 느끼게 될 때면 약속이나 한 듯이 찬바람이 나기 시작한다.

붉게 패는 억새의 이삭처럼 바람 끝에서 쌉싸름한 냄새가 겉돌기 시작한다.


꼭 이렇게 나이 먹은 티를 내고 싶진 않지만, 진부한 표현을 덧대자면, 이제는 스러져가는 빛바랜 붉은 단풍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늦가을이 더없이 좋아져 버렸다. 순번을 정하지 않고 들쭉날쭉 노래지는 것을 지나쳐, 아주 샛노란 은행잎을 보면 심장이 쿵쾅거리게 좋아진다. 어쩜 그리도 낭만적일 수가 있는 건지...

총천연색으로 잎을 물들이기가 버거워, 은행잎만큼은 그냥 단순하게 노랑으로만 물들여놓고 나 몰라라 뒷짐 지고 있는 장난꾸러기 신의 객기처럼 느껴진다.

한 번쯤은 그럴 만도 하지. 그래야 인간답지, 아니 그래야만 神답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버거운 능력 밖의 영역을 관장하는 신이라면, 한 번쯤은 아주 단순하게 자연을 부려놓기도 해야 하는 법이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런 가을 앞에서 맘이 단순하게 나대기도 하고, 술에 취하지 않고도 충분히 감상적이 되기도 한다. 밀도 높은 석양의 분홍빛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사랑의 감정을 자아내고 싶을 만큼 사랑 앞에서 속절없이 무장해제가 되고 만다.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 계절의 단순한 감정은, 숫제 가을 때문이다.

이 단순한 샛노랑 때문이다.

나는 결코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을에 태어났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가을에게는 지극히 냉소적인 나였는데, 머리칼이 하나 둘 희어지기 시작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가을을 좋아하게 돼버렸다.

이건 뭐, 인생의 수순인 건가? 나만의 법칙인 건가? 구닥다리 감성도 아니고, '내 그럴 줄 알았어!' 싶은 식상한 감성도 아니다.


나이 들면서 식성과 취향과 기호가 변하는 것처럼, 가을에 대한 정취도 변했다.

그것은 마치, 건더기를 듬뿍 넣고 끓인 된장국에서 건더기는 거들떠도 안 보고 국물만 먹던 것이, 나이 들면서는 건더기가 그리 맛있어지더라는 단순한 식성의 변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늦가을에 태어나 그런다고 합리적인 변명을 해보지만, 한 계절의 영역 안에서 가을처럼 다채롭게 하루하루가 변하는 계절도 없지 싶다.

사랑을 하고 있어도 또 사랑을 하고 싶어지는 가을!

단순하게 샛노랗게 물들어버리는 은행잎을 보다가, 할 말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대책 없는 가을! 

하지만 그러한 감흥은 몇 날 밤을 짧게 돌고 돌아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길고 긴 겨울을 위한 변주는 그토록 짧고도 강렬하다.

가을의 낮과 밤을 마주하며, 신이 계획적으로 부려놓은 색채 앞에서 꽤 여러 날 행복해했다.

다시 못 볼 것처럼 오늘의 가을을 맞았고, 내일의 가을을 누렸다.

콧 속으로 스미는 알싸한 가을의 찬 공기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며 흐린 날에도 걸었고, 쨍한 오후 햇빛 속에서도 걸었다.

점차로 머리칼이 희어지는 수가 더 늘어나고, 길었던 머리칼이 준비 없이 짧아지는 때가 오면, 그때는 그저 이유 없이 겨울이 좋아지려나?

신록의 초여름을 지나고, 계절이 중첩되어 흘러가는 가을을 넘어, 얼음을 지치고 들어선 방안이 점점이 어두워지다가 손가락 발가락이 간질거리던 그 한 겨울이 더없이 좋아지고 마려나?


그때가 되면 장독대의 옹기를 닦아 동치미를 담기도 하겠지? 수북이 쌓인 잔설을 쓸어내리며 까치가 우는 아침 마당을 서성이기도 하겠지?

그때가 되면, 또 그때 가서 나만의 계절 이야기를 써야지.

지금은, 아직은 샛노랗기만 한 은행잎이 더없이 좋다.


대책 없이 붉거나 노란, 중구난방의 신의 객기가 아직은 더 봐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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