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모든 어린이들에게 그렇듯 집은 엄마 아빠의 것이었다. 어느 동네의 어떤 집에서 사느냐는 오로지 엄마 아빠의 능력과 선택에 의해 정해진다.
우리 가족은 보통 방 세 칸짜리의 집에서 살았다. 주인집 아랫집에 세 들어 살 때도, 빌라에서 살 때도, 처음으로 자가 아파트에서 살 때도, 방은 항상 세 개였다. 안방, 오빠방, 세 자매의 방. 세 명이 같이 한 방을 공유하다 보니 내 것이랄 것이 없었다. 모든 물건들이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나의 것들을 누군가가 함부로 취급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졌고, 그래서 우리 자매는 항상 네 것, 내 것 하며 싸워댔다. 그나마 내 것으로 인정받은 물건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내 물건 위에 니 물건이 올라와 있고, 내 자리에 니 물건이 올라와 있었다.
물건들이 엉켜있는 방은 편안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방을 꾸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나는 내 소유물들과 내 공간에 마음을 너무 많이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을 주면 상처를 받게 되니.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었다. “이제 집중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언니를 제치고 먼저 내 방을 갖게 된 것이 좀 미안했지만, 내 방이 생겼다는 설렘이 무척 컸다. 베란다가 딸린 작은 방에 트윈 침대 하나, 책장이 딸린 책상 하나, 옷걸이 하나가 들어왔다. 내 첫 소유물들이었다.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마 침대도 새것이었을 것이다. 분홍색 침구류로 침대를 꾸미고, 몇 안 되는 옷들을 옷걸이에 걸었다. 책장에 문제집과 소설책을 꽂아 넣었다. 책상 아래의 책장 선반은 크고 무거운 앨범들로 가득 찼다.
처음으로 새벽에 조용히 라디오를 들었다.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했다. 마음에 드는 소설책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벌컥 벌컥 문을 열고 가족들이 들어왔다. 전화를 왜 이리 오래 하냐며 엄마가 호통을 쳤고, 동생은 자기 책가방이며 옷들을 내 방에다 내던져 놓았다. 한 번은 방에 차곡차곡 쌓여가던 불청객 같은 동생의 물건들을 다 모아다가 거실에 집어던졌다. 그날 동생과 개싸움을 했다. “니 방이 어딨어! 애초에 왜 치사하게 너만 혼자 방을 쓰는 건데!!!”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는 동생과 내내 같이 살았다. 공유하우스에서 마스터 베드룸을 하나 빌려 둘이 같이 쓰거나,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빌려 룸메이트를 들이는 식이었다. 그러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독립을 했다. 학교 근처의 작은 원룸을 빌렸다. 고시원 방보다 조금 큰 그 자취집은 첫 내 방만큼 작았다. 트윈 침대 하나, 책장이 딸린 책상 하나, 작은 장롱하나가 들어오니 집 하나가 가득 찼다. 빨래건조대를 펼치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방.
거의 잠만 자던 그 집은, 그래서 아늑하게 꾸밀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불안정했던 그 시기의 나에게는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나는 마음껏 자유로웠다. 그러다 지치면 굴 같던 그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굴은 헐벗었지만 안락했다.
결혼을 하고 우리는 원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의 영주권이 승인되면 미국으로 이민을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멕시코로 발령을 받은 시부모님이 쓰시던 그릇과 주방식기들, 가구들을 물려주셨고, 나도 쓰던 물건들을 챙겨 와 새 살림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신혼의 우리 살림은 내 취향이라기보다는 나의 어머니들의 취향으로 꾸며졌다. 남편과 단둘의 일상이 꽁냥꽁냥 행복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었다.
영주권 발급이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한국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우리는 방 두 개짜리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작은 공간에 맞추어 사느라 안 그래도 미니멀리스트였던 우리 부부는 점점 더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코비드 19 때문에 영주권 발급이 잠정적으로 중단되면서,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첫째 아이와 함께 단둘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편은 셋이 살던 투룸 전셋집에 머물고, 나는 캘리포니아 아빠 집 근처의 아파트를 빌렸다. 방 한 칸에 넓은 거실을 가진 오래된 아파트였다. 언제든 이사를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물건을 많이 사지 않았다. 이번에도 단출하게 살림을 꾸렸다. 이케아에서 싸구려 가구들을 사고, 침실에는 아이 침대와 내 매트리스만 두었다.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여도 한국집의 거의 두 배는 되는 집이었다. 거기에 물건도 거의 없으니 텅 빈 거실에서 아이는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 차도 없고, 코비드 락다운 때문에 어차피 어디를 가지도 못해, 그 아파트 단지가 우리의 세계가 되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산책을 하고, 작은 분수에서 놀고, 여름에는 아파트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평생을 한 곳에 정착한 느낌이 없이 살았다. 어릴 때에도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이사를 많이 했고, 고등학교 졸업을 한 이후에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았다. 하루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하게 쉬는 공간으로 집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 가족들과 다툴지 모르는 곳, 언제 이사를 갈지 모르는 곳, 곧 떠나게 될 곳, 좁고 답답한 곳이 집이었다.
그러다, 이제 정말 우리 집이 생긴 것이다. 남편과 두 아이, 우리 네 가족이 함께 처음 정착한 곳. 집 대출금을 30년 동안 갚아야 하는 곳. 아이들이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
첫 집은 특별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나는 이 집에 공을 들인다. 우리 아이들의 첫 기억이 만들어질 이 집이 더없이 안락하고 편안하기를,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나의 취향으로 나의 환경을 채워 나가게 될 첫 공간이다. 그래서 물건 하나를 들일 때도 나는 신중하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집 꾸미기가 어렵고 막막하지만, 괜히 인테리어 SNS를 팔로우하기도 하고 정원 가꾸기 책들을 사들이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린다.
비로소 나는 집의 편안함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