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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선 Jul 04. 2024

집문서는 노동 계약서?

미국 집은 관리에 품이 많이 든다고 했다. 매년 집 매매가의 1% 정도가 관리 보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나 할 일이 많을 줄이야.




이사 온 후 처음 몇 개월 간은 가구들을 배치하고 공간의 구역을 나누는데 집중했다. 집을 아늑하고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은 끊임없이 집을 살핀다는 의미다. 우리가 어느 공간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가장 효율적인 동선은 어떤지, 수납공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물건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배치할지, 어떤 가구들을 더 들여놓아야 더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을지.


처음에는 작은 방 2개를 첫째 아이, 둘째 아이의 방으로 나누고 마스터 베드룸을 안방으로 정했다. 하지만 두 아이의 분리 수면에 실패하면서 방을 여러 번 바꾸게 되었다. 작은 방들을 아이들의 침실과 놀이방으로 바꿀 때에는 그에 맞춰서 침대와 장난감 수납장들을 재배치했다. 결국 온 가족이 한 방에 자게 되었을 때는 안방에 침대 세 개가 들어오고, 작은 방들은 아이들의 놀이방과 서재가 되었다. 그러다 첫째 아이가 갑자기 혼자 자겠다고 선언을 하는 바람에, 바로 지난 주말에 또 방을 바꾸었다. 아이들의 서재는 첫째 아이의 방이 되고, 안방에는 부모와 둘째 아이가 남았다. 자기 방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진 첫째 아이 덕분에 한 차례 책 정리도 해야 했다. 항상 마음껏 드나들던 서재가 갑자기 언니 방으로 바뀌니 둘째 아이는 적응을 못한다. 첫째는 둘째에게,  “여기는 언니 방이야!" "나가!" "왜 언니 말을 안 들어?” 윽박을 질러댄다. 언니 방의 책들은 이제 언니 것이라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 오늘도 둘째는 (갑자기 언니 책이 된) 책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첫째는 기어코 둘째 아이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는데,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나도 동생이 “내 것”을 건드는 것을 죽어라 싫어했었다.


방의 용도가 계속 바뀌는 바람에 가구 배치를 매번 새로 하면서, 나에게 배치의 기준이 생겼다. 활동을 기준으로 집의 구역을 나누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의 놀이방은 작지만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미술 놀이 구역, 부엌 놀이 구역, 기타 장난감 구역. 책장과 부피가 큰 장난감으로 구역을 나누니 제법 작은 어린이집 같다. 


둘째 아이가 더 어렸을 때는 장난감이 많아 거실까지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거실의 파이어 플레이스 앞에 넓은 매트를 깔고, 커다란 장난감 수납함과 책장을 두었었다. 그러다 아이가 크면서 장난감을 많이 버리고 나니, 여유 공간이 생겼다. 벼르던 전자 피아노를 구입해 음악 구역을 만들었다. 피아노 옆에는 우쿨렐레와 바이올린, 그리고 악기 장난감들이 놓여있다. 


실내용 트램펄린과 유아 미끄럼틀 옆에는 나의 작은 홈 오피스를 만들었다. 원래는 안방에 있던 책상과 프린터 등이었는데, 아이들이 모두 안방에서 자게 되면서 밖으로 내왔다. 남편이 아이들을 재우는 동안 나는 뒷마당의 숲이 보이는 창 앞의 홈 오피스에서 글을 쓰거나 일기를 쓴다. 재택근무도 이곳에서 한다. 하기 싫은 일을 하거나, 쓰던 글이 막히면 숲의 나무들을 보며 쉰다. 우리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좁은 부엌을 잘 활용하기 위해 부엌 옆, 작은 아침식사 공간에 식탁 대신 부엌 캐비닛을 들여놓았다. 부엌의 캐비닛과 같은 디자인은 아니지만 크기가 얼추 맞아 부엌이 연장되는 느낌을 연출할 수 있었다. 벽면을 활용하기 위해 선반을 구입했는데, 생각보다 크기가 작아서 영 실패다. 지금은 아직 부엌살림이 많지 않아 그 선반들을 장식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후에 수납공간을 늘려야 하게 되면 오픈형 긴 선반들을 벽에 달 생각이다.


수납공간이 별로 없어, 팬트리 정리도 여러 번 했다. 여전히 마음에 완벽히 들지 않아 계속 정리를 고민 중이다. 그래도 부엌 팬트리는 문에 바구니가 달린 사다리를 설치해 공간 활용도가 크게 늘었다. 이보다 더 물건이 늘어나게 되면 이케아에서 베스타 장을 길게 짜 다이닝룸 식탁 옆에 둘 생각이다. 아니면, 눈엣가시인 텔레비전 받침대를 서랍장으로 구입하던가.


가구를 재배치하고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집을 꾸미는 노동은 거의 전적으로 내가 했다. 남편은 퇴근하면 다른 곳들에 놓여있는 가구들을 보며 처음에는 놀라워했고, 나중에는 그냥 웃었다. 어느 정도 집 정리가 되고 나서부터 나의 눈길이 집수리 쪽으로 기울면서 갑자기 남편의 일이 늘었다. 한국에서는 해볼 일이 없었던 집수리의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다. 




남편의 임무는 다양하다. 앞마당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집 기반이 썩어 들어갈까 봐 땅을 파고 파이프를 사서 심어 물길을 냈고, 거터에 낙엽이 자꾸 끼어 방지 장치도 설치했다. 앞마당에 제초제를 뿌리고 죽은 잡초들을 긁어모아 내다 버리고, 죽어가는 나무들을 전동 톱으로 잘라냈다. 뒷마당의 오래된 덱의 천막을 새로 사서 갈아 끼고,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어 주기 위해 그네를 설치하고 모래놀이 판을 조립했다. 집 외벽에 낀 이끼들을 제거하기 위해 약을 뿌리고, 자꾸만 생기는 벌집도 제거한다. 여름에는 모기약을 집 주변에 뿌리고, 뾰족뾰족 가시가 돋은 덩굴들을 잘라내어 정돈한다.

외벽의 이끼를 제거하는 남편

집 안에도 할 일이 잔뜩이다. 나는 자꾸만 남편에게 미션을 던지고, 남편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하느라고 신경이 곤두선다. 노동이 비싼 미국에서 웬만한 것은 다 남편에게 해달라고 가져오는 아내 탓이다. 남편은 커튼 봉을 설치하고, 블라인드를 갈았다. 나는 커튼이 비뚤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주변을 서성거린다. 아이들이 사용하기 어려워했던 세면대의 오래된 수도꼭지를 갈고 싶어 졌을 때에, 나는 먼저 나서서 일을 벌여놓았다. “유튜브에서 보니까 엄청 쉽던데?”,라고 남편에게 허세를 부려가며. 막상 작업을 시작하니 20년 가까이된 관과 나사가 녹이 슬어 도저히 혼자 힘으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편이 혼자 낑낑거리며 해결을 했고, 그는 ‘거봐, 내가 뭐랬어?’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이제 이런 집안 유지 보수 수리일에 패턴이 생겼다. 무언가 불편하거나 안 예쁜 것을 발견한다 → 남편에게 불평을 시작한다. →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아보고, 필요한 부품을 주문한다 → 혼자 해본다 → 안 된다 → 남편에게 일을 맡긴다.

새 블라인드를 달고 있는 남편


남편은 일단 일이 많아지는 것이 싫다. 회사를 다니면서 육아와 집안일을 하는 것도 힘든데, 자꾸 급하지 않은 일거리들을 내가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원과 텃밭도 그런 일들 중 하나였다. 지금은 두 생명을 잘 키워내는 것만 집중하자는 남편의 진심 가득한 푸념에 고개를 끄덕여놓고, 매주마다 프로젝트를 벌리는 아내에게 화가 날 법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싸웠다. 나는 같이 우리 집을 꾸미고 꾸려나가고 싶은데 남편이 동조하지 않아 서운하고, 남편은 힘들어 죽겠는데 자기 의견은 안중에도 없는 듯 구는 아내가 서운한 탓이다. 그렇게 투닥거리면서 우리는 2년 동안 이 집을 가꾸었다. 노동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얼추 우리의 손발이 잘 맞아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태산이다. 앞마당에 야생화 시드 믹스도 뿌려야 하고, 텃밭도 더 잘 가꾸어야 하고, 나무도 잘라야 하고, 헛간도 바꾸어야 하고, 안방 화장실 리모델링도 해야 하고, 실내에 식물들도 더 들여놔야 하고… 리스트를 만들자면 끝이 없다. 이제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의 무게를 잘 안다. 소유에 뒤따르는 책임,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동을. 


나는 우리 집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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