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들을 사랑하라”

이별의 능력, 김행숙, 문학과지성사 (2007)

by 클레어

첫 시집 『사춘기』에서 직관적으로 감흥이 이는 시들을 만났기에, 두 번째 시집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별의 능력』을 읽는 동안은 힘들었다. 아무리 김행숙의 시들은 의미를 파악하지 말고 느낌으로 읽으라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시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시에는 머리에 꽂히는 문장들이 있었다. 이는 분명 시인의 역량이었다. 그런 문장들을 중심으로 다시 시를 읽어보았지만 곧 피곤해졌고 살짝 부아가 났다.




가난한 나에게도 신화가 있다


하룻밤
하룻밤만 재워줘. 밤은 충분히 길고, 너무 큰 가방은 언제나 이야기보따리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는 19세기 나그네처럼 오늘 밤에도 문을 두드려. 그렇지만 아주머니, 우리 집엔 빈방이 없어요. 빈방이 있다면, 왜 내가 여동생들과 한방을 쓰겠어요? 속옷을 나눠 입는 우리들은 서로를 반사해요.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나는 독창적인 인물이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얘야, 마구간이라도 괜찮단다. 말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동물이잖니. 우리들의 머나먼 할아버지가 말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갈 때, 그는 비밀을 품고 있었단다. 그가 하룻밤을 더 달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테지. 그렇지만 알 수 없어요, 아주머니. 나그네가 두드리는 문이 모두 열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마을은 강간과 간통으로 세워졌어요. 전설적인 인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알에서 까마귀처럼 깨어났지요. 아주머니가 내 어머니라고 해도 놀랍지 않지만, 우리 집엔 마구간도 낡은 자가용도 없어요. 하룻밤은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지나가버린단다. 그렇지만 얘야, 영원히 눈을 감는다면 하룻밤은 계속해서 흐르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의 미소와 함께

「하룻밤」을 읽으며 가난했던 어린 내가 여동생과 나눠 입던 속옷을 입고, 여동생과 함께 쓰던 한방에서 이야기들을 읽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막연한 경외심과 동경, 세상이 크게 확장했다가 책을 덮는 순간 작은 나에게로 축소되는 기묘한 상실감, 어떤 반발심 같은 것이 이 시를 읽을 때 조용히 떠올랐다.


가난한 나에게도 신화와 전설과 역사가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흘러내려오는 배경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렇게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하룻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시는 신화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감각이 몰아치는 시간


「얼굴의 탄생」에서는 “나는 나에 한정없이 가까워”라는 문장이 마음에 남아, 그 문장으로 시를 다시 읽고 다시 읽었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감각이 뒤엉켰다.


개가 “높이 뛰어오르고” “툭, 하고 떨어지는” 인상. “빵” 하고 지나가는 소리들. 검은 비닐봉지와 어둠의 시각. “이빨 사이에 고기가 끼”는 촉각. 냄새. 감각들은 그로테스크했고, 나는 불편했고, 이 불편함이 이 시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후에 뒤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으로 그나마 해석이 더해졌다. 그의 해석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다시 읽으면 여전히 감각이 몰아쳐서 해석을 잊게 된다.


현실의 사랑 노래


닭고기 파티

파티는 절정을 초과하여 이상한 나라로. 절정에서. 우리는 닭의 벼슬을. 얇은. 말랑말랑한. 절정을 지나 우리는 닭의 부리를. 우리는 애정의 표시로 서로에게 쿡쿡.
절정에서. 절정을 지나서 우리는 뚝. 사랑을 멈출 수 있을까? 이미 닭들은 우리의 위와 창자를 바이올린처럼. 피아노의 흰건반과 검은건반처럼. 장구처럼. 개수통의 그릇들처럼. 연주하기 시작했네. 가슴살과 희미한 날개. 닭의 발이 뭉개져 있네. 머리 위에서 터진 달걀 폭탄처럼.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하지 않은 나라로. 우리는 스며드는 습기처럼. 바다를 건너온 바람처럼. 조금 따뜻하고 조금 더러운. 우리는 음악처럼. 핑크색 봄처럼. 어느 여름날들처럼. 진한 냄새를. 우리는 더 부드러운 피부와 깃털 같은 옷을 원하고. 원하는 것들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태어나기 전으로. 노년의 미소 같은 것을 떠올렸네. 우리의 노래는 여운이 남아. 끝까지.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네. 파티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초저녁에 옷을 벗고. 더 먼 곳에 누워서 더 작은 아기처럼. 서로 얼굴을 돌린 작은 소녀들처럼. 잠이 드네. 짝짝짝. 하하하. 파티는 더 먼 곳으로. 흘러갈수록 오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네. 약이 오른 닭들은 길게 목을 빼고 푸드덕. 이상한 나라로 뒤뚱뒤뚱.


「닭고기 파티」는 내게 현실의 사랑 노래 같았다. 남편과의 연애시절이 생각났고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의 우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결론에 안도했고 그래서 사랑이 뭉글뭉글 피어났다.


아마도 나는 먼 미래에 ’아? 이런 “느낌의” 시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뭐지?’하고 이 시를 떠올리려 애쓸 것이다. 김행숙의 시들은 내게 어떤 감각의, 혹은 시적 경험의 인덱스가 될 것이다. 물론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어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찾아내는 경우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독창적인 자화상을 꿈꾸며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손」이었다.




마차에서 말들이 분리되는 순간
마차는 스톱!하지 않았다
마차는
서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쓴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말발굽들처럼

극적으로 쓰러지는 대단원의 인물들처럼
다시 일어나 화려하게 웃으며 무대인사를 하는 여배우처럼
다른 사람처럼

허공에 휘어진 채찍처럼
나는 만지고
사랑하였다

나는 쓴다, 쓰고 나서 지우지 않고 쓴다
나는 살인의 현장을 지나, 떨어져 있는 칼, 다시 떨어져 있는 손, 갈퀴, 나의 가난
추적자의 손길처럼
환해지고
집요해진다

왕의 주먹이 만들어지고
쾅, 원탁의 한가운데를 내리치고 솟구치는
나의 날개
세계에 떨어지는 주사위들


“쓴다”라는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가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가닿지 않을까? 시인의 자화상 같은 시였다. 나도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 이렇게 독창적인 자화상을 쓸 수 있게 될까?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시집을 다 읽고, 나는 안도하며 평론을 읽기 시작했다. 신형철 평론가여서 기뻤다. 그리고 그의 해석에 감탄했다. 시뮬라크르. 그래, 정말 그렇다.


그녀는 ‘시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부류의 시는 본질적으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그녀의 시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맞다, 정말 “시만이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라고 동의했지만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했다. “비인칭적 개별성과 4인칭 단수의 목소리가 연합하여 만들어낸” 시들에 독자가 얼마나 감응할 수 있을까? 극 개별성에서 독자는 어떤 보편성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찰나의 인상, 감각, 경험뿐이라면 독자는 찰나의 시적 인상, 시적 감각, 시적 경험을 한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김행숙의 다음 시집들을 읽으면서 계속 답을 찾아야 할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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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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