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0)
그림자가 일어선다. 갑작스럽게, 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림자가 일어서면 그림자 주인은 그 그림자를 따라간다.
그림자가 당기는 대로 맥없이 따라가다보면 왠지 홀가분하고, 맹하니 좋거든.
그림자는 생의 이면이다. 일어서는 그림자를 마주하는 것은 죽음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생이 고독하고 힘겨울 때, 우리는 마음속에서 슬그머니 일어서는 어둠을 맞닥뜨린다. 그림자는 형체가 없고 경계가 없다. 그림자의 불확정성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까. 가늠할 수 없기에 더 두려운 것. 그래서 맥을 놓는다. 생각을 놓는다. 자신을 놓는다. 그러면 죽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
은교의 그림자가 처음 일어선 숲에서 은교가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무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켜준다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옆에 있다가 말을 걸어주었을 뿐이다. 무재와 은교의 사랑도 거창하지 않다. 안부를 묻고, 같이 밥을 먹고, 서로의 가마를 확인하는 일. 그뿐이다. 이 소설이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소소함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도 소소하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들은 참 단정한 대화를 나눈다. 대화뿐 아니라 서술도 단정하고 깨끗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림자라는 소재가 자못 진부하게 느껴져도, 사람들의 사연이 유행가 가사처럼 듣고 듣고 또 들어본 이야기들뿐이어도 소설은 신파적이지 않다. 오히려 뻔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세상사라는 경건한 마음이 생기면서, 더 깊게 공감하게 된다.
은교와 무재는 도심의 전자상가에서 일한다.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음향기기를 수리해 온 여씨 아저씨의 곁에서, 은교는 잡동사니가 가득 든 서랍을 정리하기도 하고 심부름을 하기도 한다. 건물 다섯 개 동 중 한 개 동이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리에 조성된 공원에 앉아 은교와 무재는 궁금해한다.
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여러 사건들이 떠오르는 설정이다. 독자는 또 숙연해진다.
마음이 아쉬워 출근하는 길에 일부러 그쪽에 들러보면 간판도 떼어내지 않은 채로 가게들은 버려져 있었고, 누군가 유백색 페인트로 벽마다 커다랗게 가위표를 그려둔 좁다란 골목이 황량하게 빈 채로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는 발전을 계속하고, 가난한 것, 아름답지 않은 것, 오래된 것은 "슬럼"과 같은 말로 묶여 사라진다. 그 구역을 슬럼이라고 지칭하는, 슬럼 바깥의 사람들은 정작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죽기라도 해야 혀를 끌끌 차는 정도다.
그들의 이야기는 숲이라는 외딴곳에서 시작해 섬에서 끝난다. 알려지지 않거나 고립된 곳. 은교와 무재는 어둠 속을 함께 걷는다. 은교와 무재는 어둠 속을 함께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