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 Forty Tales from the Afterlives
사후세계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간략한 줄거리를 ChatGPT에 입력하고 추천 도서 목록을 받았다. 언제나 한 발 앞서 나가는 ChatGPT는 도서 목록뿐만 아니라 6주 독서 계획과 그에 따른 창작 과제까지 만들어 주어, 일단 첫 번째 주의 과제 도서들을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6주 스케줄을 따르지 못해 이 책을 읽는 데 한 달이 걸리고 말았지만.)
첫 책이 '뇌과학계의 칼 세이건'으로 유명하다는 데이비드 이글먼의 이 책이었다. 한국에는 『SUM(썸): 내세에서 찾은 40가지 삶의 독한 비밀들』이라는 제목으로 2011년에 출간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었다. 번역자가 왜 "삶의 독한 비밀들"이라는 의역을 했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지만, 그냥 "40개의 내세 이야기" 정도로 가볍게 번역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한 달 동안 붙잡고 있었던 이유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충격적일 만큼 창의적이어서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과학적이고 철학적이어서 한 이야기를 읽으면 그 내세를 꼭꼭 씹어 소화시키고 던져진 질문들에 내 나름의 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영감을 받았다. 소설을 쓰면서 나 스스로 답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동시에 더 잘 살고 싶어졌다. 그것은 이 책이 두루뭉술하게 "죽으면 후회할 테니 지금 삶을 잘 살아가"라는 식으로 내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존재, 사랑과 의미 같은 철학적 질문들을 구체적이고 재치 있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이 뻗어나가는 스케일 자체가 놀랍다.
ChatGPT에게 40개의 이야기를 요약해 달라고 부탁했다. 목차부터 틀린 요약이 너무 엉성해서 웃음이 나왔다. ChatGPT가 덧붙였다. "� 위 요약은 짧게 핵심 아이디어만 담은 거라, 실제 책은 훨씬 더 기발하고 풍자적이에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요약을 요청한 내가 바보지.
몇 개의 이야기들을 골라서, 멋진 문장들을 소개해보자면:
In the afterlife you relive all your experience.
사후세계에서 너는 너의 모든 경험을 다시 살아낸다.
그냥 순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건별로 묶인 경험들을 한 번에 해치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5개월 동안 화장실에서 잡지를 들추고(우리는 스마트폰을 보겠지), 27시간 동안 인생의 모든 고통을 몰아서 겪고, 6일 동안 손발톱을 깎는다. 이 사후세계는 그냥 지옥인 것 같다.
the afterlife: the world is only made up of people you’ve met before.
사후세계는 네가 이전에 만난 사람들로만 구성된 세계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락하고 편할 것 같은 이 세계. 하지만,
no one listens or sympathizes with you, because this is precisely what you chose when you were alive.
누구도 너에게 공감하거나 너의 불평을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정확하게 네가 살아있을 때 네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문장으로 죽이기.
이 사후세계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종의 사다리를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없다. 복잡한 인간사에 지쳤던 어떤 인간이 말이 되기로 선택한다. 몸이 변화를 겪는 동안 그는 깨닫는다.
you cannot appreciate the destination without knowing the starting point; you cannot revel in the simplicity unless you remember the alternatives.
출발점을 알지 못하면 도착지를 온전히 누릴 수 없고, 다른 선택지를 기억하지 못하면 단순함의 즐거움도 만끽할 수 없다.
말의 단순함을 그는 더 이상 즐길 수 없다. 그가 말로 변화하면서 인간의 인식 수준에서 말의 인식 수준으로 낮아지기 때문이다. 말의 단순함을 찬양할 수 있는 것도, 인간사의 복잡 다난함을 불평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Meaning varies with spatial scale.
공간적 크기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저자의 과학적 상상력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몇 있다. 그들은 모두 스케일에 대한 탐색을 한다. 아주아주 작은 크기에서 아주아주 큰 크기까지. 세포에서 우주까지.
나도 저자와 비슷한 상상을 자주 한다. 인간은 우주라는 생물의 지구라는 세포, 인간은 암이다,라는 식의 염세주의에서부터 우주의 질서 자체가 신이라는 스케일 큰 신학론까지. 그가 스케일을 가지고 노는 상상의 유희가 반갑고 재미있었다.
And that is the curse of this room: since we live in the heads of those who remember us, we lose control of our lives and become who they want us to be.
그것이 바로 이 방의 저주다. 우리는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살아가기에, 우리의 삶을 통제할 수 없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기억하는 주체가 자아이다. 기억을 구성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면 타자가 된다.
It is not the brave who can handle the big face, it is the brave who can handle its absence.
거대한 존재를 다룰 수 있는 자가 용기 있는 자가 아니다. 거대한 존재의 부재를 다룰 수 있는 자가 용기 있는 자다.
이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내세는 연옥 같은 것인데, 죽으면 서서히 모든 기억과 자신에 대한 인식들이 사라지고 결국 벌거벗은 의식만이 남는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머릿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한다.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만이 진정 우리의 진실이다. 이 내세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의식으로 타인들이 우리에게 들이미는 거울들을 본다.
You see yourself clearly for the first time. And that is what finally kills you.
당신은 처음으로 자신을 선명히 본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마침내 당신을 죽인다.
또 한 번의 촌철살인.
내세에서 몇 살의 자아로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신이 인간을 모든 나이로 쪼갠다. 우리는 다른 나이의 우리 자신을 계속 마주친다.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신에 대한 생각이 많은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다. 신은 우리가 믿는 그 어떤 신도 아니고 오히려 그 총체와 같은, 우리가 전혀 가늠할 수 없이 큰 존재이다. 그런 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죽은 자들에게 진실의 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는 인간들이 진실을 발견할까 봐 겁낸다. 그리고 믿는 자들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을 싫어한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천국에서 그녀의 진실의 책을 볼 수 있게 되고,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믿음이 너무 강해서 그들은 진실의 책을 믿지 않는다. 신은 믿지 않는 믿는 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외롭게 살아간다.
이 이야기는 내가 상상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내세를 보여주었다. 인간이 죽으면 무수히 많은 원자로 쪼개져 세상을 떠돈다. 나의 상상과 다른 것은 이 원자들이 자아의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스케일의 동시다발적인 경험을 하는 이 원자들은 끝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자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원자들을 끝없이 찾아 헤맨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삶을 반추할 수 없듯 내세를 상상하지 않고는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작가가 기발하게 써 내려간 내세 이야기 하나하나가 독특한 관점에서 삶에 철학적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가.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는가. 나의 삶은 가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