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는 걸 좋아하니?”
상상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I니 T니 E니 뭐 아무튼 사람들의 성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어. 그래도 상상이라는 건 가끔씩 해줘야 해. 이게 몸뚱아리 같아서 과하게 쓰면 탈이 나기도 하지만, 너무 안 하면 몸이 굳어버리는 것처럼 상상하는 방법도 굳어버리거든. 그래서 어떤 상상이든 주기적으로 해줘야 해. 그것이 인륜을 저버리고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일지라도 말이야. 애초에 상상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 무엇이든 해도 되는 것, 말야. 그게 진정한 자유 아닐까?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어떤 누구도 너에게 간섭할 수 없어. 네가 타인에게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이상 말이야.
난 사람들이 싫어질 때면 하는 상상이 있어. 그런 말 있잖아, ‘인류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그럴 때가 있잖아. 나 또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 … <나만 그런가?> 아무튼, 그 정도로 사람들이 싫어질 때 하는 상상이 있어.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나 빼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고, 그 상황 속에서 혼자 생존하는 상상을 하는 거야. 여러 가지 가정을 세우면서 말이야. 스스로 난이도를 조절하는 거지. 대형마트라는 어드밴티지에서 시작하니까 쉽게 풀어나가는 면이 없진 않거든. 이를테면 전기를 없앤다든지, 외계 괴물을 등장시킨다든지, 나보다 강한 또 다른 생존자가 나타난다든지 하는 거지. 그렇게 한참을 생존에 골몰하다 보면 평소 주위에서 나에게 고마웠던 사람들이 문득문득 스쳐 지나가. ‘이 순간에 그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야. 그러면 조금 숨이 쉬어져.
그리고 이건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얘기할게. 내가 상상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빌런들을 만들기 위해서야. 나에게 모욕감을 준 존재를 빌런으로 등장시키는 거지. 앞에 말한 외계인이나 또 다른 생존자를 상상 속에서 현실 인물이 아닌 더 악독한 존재로 만들어서 온갖 무기로 응징하는 거야. 그러면 속이 풀려. 무지하게. <나만 그런가?> 너희는 그런 상상 안 해?
근데 가끔은 이상하기도 해. 꼭 마트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만 상상하게 돼. 다른 상상도 할 수 있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마트 상상 이외에는 생각이 벗어나질 않아. 꼭 감옥처럼 말이야. 그래서 한번은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공책에다 상황을 만들고 그걸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했는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해무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게 되는 거야. 보일 듯 말 듯 흐려져 버려. 결국 마트 상상 마스터가 되어버리는 거지.
진짜 만약 소설 속처럼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트에서 갇힌 상황에서 세계 종말이 온다면,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을 자신이 있어. 절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야. 마트라고 해서 생존이 편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어느 상황보다는 나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편한 건 아니거든. 처음 시작이 중요해. 시작 며칠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몇 년을 더 사느냐 못 사느냐가 결정되거든. 예를 들어 신선식품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면 몇 달 치 음식을 날리게 돼. 아니, 어쩔 수 없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만 먹게 되니까 몇 년 치 음식을 허비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때를 놓쳐선 안 되는 일들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시기와 때를 잘 조절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를 잃게 되거든.
근데 무섭고 웃긴 게 뭔지 알아? 그걸 눈치채는 순간은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 가장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을 때야. 그제야 알게 되는 거지. 자신이 과거에 했던 모든 행동들의 의미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거야. 아무튼 그래. 이런 상상을 진지하게 하고 있으면 인간에 대한 분노는 어느 정도 사라지더라. 누군가를 좋다, 싫다 하는 감정은 생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지.
너희도 너희만의 멀티버스가 있니? 머릿속에 말이야. 그런 게 없다면 하나쯤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물론 거기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되겠지만, 적당한 꿈동산은 어쩌면 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