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바라본다. 아스라이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숨이 막혀 온다. 갑갑하다. 답답하다. 날씨는 우중충한데 햇빛은 유난히 따갑다. 맞지 않는 것들이 맞는 것 같고, 맞는 것들이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냥 모든 것들이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옆에 누군가 담배를 피우는데, 공중으로 흩날리는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저 멀리 있는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흘러간다.
고등학생 때 어떤 여자가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도,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여자이다. 그냥 친구 녀석의 친구였고, 복도나 식당이나 운동장에서 오다가다 한 번씩 눈에 들어왔던 여자였다.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아니, 딱 한 번 했다. 친구 녀석을 찾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던 게 전부였다. 웃기지 않은가. 숨이 턱턱 차오르는 무거운 느낌에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왜 그 여자 얼굴과 눈빛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보통은 첫사랑이라든지 그런 사람이 떠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뇌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 여자를 떠올리고 있는 거니?”라고.
그 여자와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운동장에서 그 여자가 자신의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내 친구와 이야기하는 와중에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의 나라면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눈빛을 피했을 텐데, 그때 그 순간만큼은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허공을 떠도는 말소리 속에 여자와 한참을 눈을 맞추었다.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그냥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도 왜인지 내 시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여자의 감정이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겨울날 뜨끈한 국물을 먹은 듯한 감정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냥 그렇다는 거다.’ 피곤하고 몸은 무겁고, 10분의 짜투리 잠에 목숨을 거는 나인데, 잠은 안 자고 멍하니 떠올린 게 올해 먹은 설날 떡국도 아니고,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도 아니고,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이 달달해지는 첫사랑도 아니고, 누군가 물어보면 한참을 생각해도 떠올릴까 말까 한 존재에 대한 생각이라니. 정말이지 어줍잖게 나 자신에게 궁금증이 일어나 글로써 긁적이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이상하리만큼 머릿속 그림들의 화풍은 화려해지기만 할 뿐이다. 희뿌연 색깔이 오색빛깔로 바뀐다. 사진 같던 그림은 점점 그림이 그림다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 정도로 난 지금 지쳐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힘이 들면 들수록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올 때면 이상하게 일이 꼬이거나 황당한 일을 겪거나 정말 화가 날 때 웃음이 나왔다. 오히려 애매한 상황에서 화를 내게 된다. 누가 봐도 별것 아닌 일에 말이다. 뇌가 망가진 것 같다. 이상하게 고장이 난 것 같다. 작동해야 할 때 작동하지 않고, 작동하지 말아야 할 때 작동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자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삭제되었어야 할 무언가가 유유자적하다. 버그처럼 떠올랐다.
요즘 들어 자주 이런 기분이 든다. 눈 뜨고 얼마 안 있다가 똑같은 장소에 비슷한 방법으로 있다. 가끔은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 모를 때도 있다. 어쩌면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 적 있다. 그냥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간다.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담배 연기가 훌훌 날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있었다. 움직이는 듯도 했다.
사람들도 짚신인형처럼 보인다.
여자가 생각났다.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를 눈을 마주친다. 카메라가 줌하듯 그 여자 얼굴이 커져 보인다. 그때도, 조금 전에도 몰랐는데 여자의 입술이 달싹인다. 뭐라고 말한다.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 여자의 입술을 한 글자씩 알아보려 유심히 떠올린다.
“여. 기. 있. 으. 면. 죽. 어.”
그리고 그 순간 깜빡하더니 눈이 떠졌다. 천장이 보였다. 낯설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낯설었다. 하지만 어쩐지 익숙하다. 서서히 만조가 되듯 어떤 기억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웃음이 나왔다. 꿈이라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진실이었어도, 진실이 아니었어도 다 뭔가 허무해진다. 결론은 없다. 망상증 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