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by J팔

출근일 신호등을 기다린다. 루틴대로 움직였더라면 늘 그러하듯 파란불을 기다리는 일 없이 바로 건널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침 믹서기가 갈리는 모습을 보다. 이상한 생각을 해버려 5분 정도를 지체해버렸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통근 버스를 타는 내내 그 생각에 머리가 가득했다.


‘왜 난, 먼 생각을 한 것일까’


그렇게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잠겨버리는 듯했지만 일에 묻히다 보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문득문득 떠오르기는 했지만 별일 아닌 일이라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럴 수 있는 해프닝쯤으로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다음 날도 또다시 그 다다음 날도 말이다.


점점 그 주기가 길어지기도 믹서기 앞에서만 아닌 세탁기나 전자레인지 앞에서도 그랬다. 믹서기를 피하려 일부러 작동시키지 않았는데 다른 기기 앞에서 딴생각이라니 하지만 일과되게 그리고 차츰 긴 시간을 들여 딴 생각을 한다. 딴생각이 생산적인 일이라면 꺼림칙하지 않을 텐데 어떤 몽상에 젖어 있을 때는 뇌세포 하나하나가 찌릿하듯 신호가 오는데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잉여인간이란 말을 싫어하지만 딱 잉여인간처럼 그렇게 멍하니 있었는 듯했다.


점점 몽상이 길어진 아침 드디어 기시간이 너무 길어져 아슬아슬하게 회사 지각과 아닌 그 사이까지 몽상했던 날 뛰는 것을 극도로 싫어 하는 내가 너무 싫어 엄청난 시간에 여유를 두고 출근했던 내가 뛰어가게 만들 정도로 긴 시간을 몽상하게 된 날 여전히 빨간불에 신호가 잡혔다.


깊고 날카로운 숨을 헐떡이며 신호등 저편 어떤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철로 되어 있는 기계가 알 수 없는 숫자와 빛의 반짝임을 뿜어 내고 있었다. ‘왜 나는 갑자기 저 기계가 궁금해졌을까?’


난 출근 시간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기계 앞에 천천히 다가갔다.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그러면 안 돼 지금 뛰어도 통근버스에 제시간에 도착할까 말까 해 그저 그런 길바닥에 있는 기계일 뿐이야 뛰어 라고 소리 지르고 있지만 난 듣지 못했다. 아니 무시하고 하며 얼빠진 사람처럼 또 기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무릇 기계는 어떤 용도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기계는 무슨 용도인지 왜 작동하는지 모르겠다. 기계에 연결되어 있는 길고 많이도 뻗어 있는 전선들은 바닥 저 어디로 꽂혀 있어 어디 연결되었는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뭐라도 적혀 있는 글씨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무런 글자 하나 없이 불빛과 숫자들만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에는 이날 거금 만 원 들여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말이다.


뭐가 문제일까 일부러 더 일찍 나가기도 다른 길로 가 보기도 둘 다 해 보기도 했는데 여전히 시간에 얽매이면서도 그런 것이 없다는 듯 불나방처럼 기계의 반짝임에 이끌려 기계 앞에 물끄러미 서 있었다.


현재 나의 생각에는 아무 이유 없이 분주히 움직이는 기계 앞에서 말이다. 이제는 출근이고 지각이고 상관없이 기계의 용도와 목적에만 온통 신경이 쓰였다.


“넌 왜 숫자가 많아졌다 적어지고 빛을 반짝이니”


허공에 차가운 입김을 뿜어 내며 읊조려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어색하게 시간과 공간만이 움직일 뿐이다.


난 언제쯤 이 기계를 알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는 늦지 않고 평소처럼 늘 평화로웠던 루틴의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난 그러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기를 바라는 걸까?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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