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이주 필수템 (1) - 밥이 주식이라면!
'아, 이걸 안 들고 왔으면 어떡할 뻔했어!'
덴마크에 사는 동안 셀 수 없이 속으로 이 말을 되뇌게 했던 물건, 바로 쿠쿠 전기압력밥솥이다.
한국에서는 8인용을 쓰고 있던 터라, 이민 가방에 넣어 오기에는 무게가 너무 나가서 아마존을 뒤져봤다. 근데 독일 아마존에는 우리나라 전기밥솥이 없었다. 비슷한 것으로 instant pot이 있었고, 일반 압력솥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이긴 했다. 그래도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밥이 제대로 되어야 주방일이 덜 힘들 것인데. 압력솥에 밥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시간 맞춰 불 줄이고, 뜸 들이는 시간도 잘 지켜야 밥이 맛있게 된다. 그 과정이 심히 귀찮아서 한국에서도 몇 번 하다가 다시 전기밥솥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어찌할지 고민하던 중, 당근에서 사랑스러운 3인용 쿠쿠 전기밥솥을 발견하고는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라면, 충분히 덴마크에 들고 갈 수 있어 보여 당장 사러 가겠다고 연락을 보냈다. 박스 포장만 뜯었던 새 제품을 좋은 가격에 사서 기분 좋게 들고 와 지금까지 너무 잘 쓰고 있다.
매일 아침 쌀을 씻어 안치면,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압력추가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증기가 배출된다. 그리고 새벽의 적막을 깨며, 마지막에 쿠쿠가 들려주는 사랑스러운 목소리 '쿠쿠가 맛있는 밥을 완성하였습니다!잘 저어주세요~' 이것은 나의 하루가 잘 준비되고 있다고 말해주는 기분 좋은 목소리이다.
그리고 코 끝으로 스며드는 구수한 밥 냄새.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지!' 오죽하면, 집을 내놓고 잘 안 나가면 사람들이 집 보러 올 때, 밥을 하라는 말이 있을까. 고향의 냄새 같기도 하고, 엄마 냄새 같기도 한, 오감을 자극하는 밥 냄새가 저만치서 날 때, 한 번씩 생각한다. '이건 진짜 가지고 오는 게 맞았어!'
덴마크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쌀은 크게 세 종류가 있다. 태국 쌀인 Jasmin rice와 인도/파키스탄 쌀인 Basmati rice, 그리고 덴마크 사람들도 쌀죽을 먹는지 죽 만들기용 쌀 (grødris) 이 있는데 그중 가장 모양이 한국 쌀과 비슷한 것은 죽 만들기용 쌀이다.
그 외에는 초밥용 쌀과 리소토용 쌀도 팔기는 했는데, 위의 세 가지 쌀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져 매일 밥을 해 먹는 우리가 사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 여행 가서 리소토 쌀로 냄비 밥을 했는데 이건 맛도 별로였다. 초밥용 쌀이 가장 우리 먹는 밥 식감과 비슷해서 할인판매를 할 때 쟁여놓고 grødris와 섞어서 밥을 하기도 했다.
마트에서 처음 grødris의 모양을 보고, 한국 쌀이랑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런데 쿠쿠로 백미 정량에 맞추어 물을 붓고 밥을 해보니 너무 질게 되었다. 그리고 주걱으로 몇 번 저어주니 으깨져 버리는 것이, 이래서 죽 만들기용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물을 좀 적게 넣고 밥을 했더니 좀 더 먹기가 나았다. 전에 건강을 위해 기름을 조금 넣고 밥을 하면 일부가 저항성 전분으로 변한다고 들어서 여기서는 아주 흔한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를 한 스푼 넣고 했다. 그랬더니 밥이 윤기가 돌면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재스민 쌀은 태국 요리할 때 쓰는 거라고 생각해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죽 만들기용으로는 아무리 쿠쿠라도 2% 부족한 느낌이라 실험정신을 발동했다. 두 가지를 반반 섞어서 해 보았는데, 오 이게 웬일! 두 쌀을 섞어서 앉히고 아보카도유도 조금 넣어준 뒤 밥을 하니 훨씬 맛있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실험 과정을 거쳐, 이제는 5분 도미 비슷한 현미 재스민 쌀도 섞고, 귀리쌀도 섞어서 밥을 한다. 급하면 흰쌀밥을 하게 될 유혹에 빠질까 봐 쌀통에 아예 네 가지 쌀을 섞어 놓았다. 물론 남편과 딸은 흰쌀밥을 외치지만, 그게 몸에 별로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미 밥을 하는 것은 엄마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꿋꿋이 잡곡밥을 하고 있다. 아마, 쿠쿠가 없었다면 나는 이런 실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몇 번의 수고 끝에 간신히 찾아냈을 밥 짓기 레시피를 고수하며 흰밥만 하고 있었겠지. 지금은 쿠쿠를 가지고 있는 덴마크 한국인들에게 잡곡밥을 전파까지 하는 중이다.
아직도 잡곡밥을 보면 투덜거리고, 남의 집 가서 흰쌀밥 나오면 환호를 지르는 저 두 사람, 얄밉지만 나는 굽히지 않을 것이다.
쿠쿠가 해주는 잡곡밥이 얼마나 맛있는데! 왜 그 맛을 모르니?
한국에 돌아가서도 우리 집에 흰쌀밥은 없을 예정이니 기대도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