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운전 중에 무심코 라디오를 켰다. 부부싸움에 관한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듣다 보니 너무 공감되어 귓구멍을 더 쫑긋 열고 들었다. 사연 소개가 끝나고 DJ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연은 65세 김순자 할머니께서 보내신 사연입니다. 65세가 되셨는데도 신혼 때 할아버지께서 서운하게 한 일들이 생각 나 아직까지도 울화통이 터지신다고 합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설마 나도 65살까지 남편하고 저래야 된다고?'
나는 결혼생활 내내 남편이 변화되길 바랐다. 어느 날 갑자기, 싸움닭으로 변신해 나를 대신하여 시댁 식구들의 주둥이에 피가 나도록 쪼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남편에게 틈만 나면 가스라이팅을 했다. 이런이런 상황이 생기면 이런 말을 해야 한다, 맹꽁이처럼 보이지 말고 카리스마 있게 행동해라 등등
남편은 알았다며 오늘은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지만, 막상 술판이 시작되고 시아버지의 거친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면 남편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을 쿡쿡 찔러가며 '오늘은 할 거라며~'라고 사인을 보냈지만 남편은 언제 그랬냐는 표정으로 먼 산만을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남편이 변하길 바란 세월도 어느덧 8년이 흘렀고 나는 40의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남편은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지만 여전히 오늘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이제 남편을 믿지 않는다. 남편이 걱정하지 말란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믿고 에너지를 쏟았으며 오랜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
내가 왜 남편이 변하길 기대했을까 나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내 입에 칼을 물기 싫었다. 고상하게 살고 싶었고 남편이 아내의 편을 들어주는, 누가 봐도 사랑받는 여자의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결혼하기 전 암사슴이, 결혼하면 암사자가 된다고, 나는 그렇게 천하무적의 드센 아주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까지나 고상한 암사슴이고 싶었다.
앞자리가 바뀌고 보니, 지나간 나의 30대는 그렇게 미움받으며 흘려보내기엔 참 아까운 젊은 날들이었다.
'사람은 절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언은 괜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이 결국 백마 탄 왕자님처럼 짠 하고 나타나 지옥불 같은 시댁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거라는 판타지를 갖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무슨 평강공주라도 되어 바보머저리 같은 남편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지금과 같이 판타지속에 살다가는, 나 역시도 65세씩이나 되어 70 먹은 남편에게 몇 십 년 전 일을 들먹이며 서운하다고 바가지를 긁어대는, 65세 김순자 할머니 같은 삶을 살 것이 눈앞에 그려졌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내 힘을 빼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사실을 오랜 시간을 견디고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