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뵈브 글리코
사실 나는 강릉에 와있다. 그것도 혼자서, 심지어 아주 좋은 호텔에서 묵고 있다. 성공한 여성의 상징인 샴페인도 마시려고 준비를 했는데 향도 맡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연은 이랬다. 미야쌤이 운영하는 글 빵에서 제주도 정모를 한다고 했다. 채팅방에서 투표가 된 날짜를 보니 10월 말이었다. 남편에게 이날에는 미야쌤을 만날거라 이야기하고, 핸드폰에 일정을 입력했다. 그런데 당일치기로 다녀올지, 하룻밤을 자고 올지 고민이 되었다.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다 정작 주관자에게 연락을 못 했다.
글빵 강의를 보다가 날짜가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당연히 참여하겠다는 사람끼리 채팅방이 만들어졌을 테고 여러 의견을 조율한 결과였을 것이었다. 왜 미야쌤에게 갈 수 있다고 말을 하지 않았지. 하필 그날엔 오래전부터 정해둔 약속이 있었다.
남편에게 자유부인 쿠폰을 받았는데, 못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혼자 갈만한 여행지를 물색했고 평소 가고 싶었던 강릉 호텔을 결제해 버렸다. 아름다운 바닷가 야경과 뽀글거리는 샴페인을 한 모금 홀짝 할 내 모습을 상상하며 이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했다. 그때가 10월 초였다.
7월부터 9월까지 많이 바빴다. 크고 작은 글쓰기 공모전 준비도 했고, 개인적인 일로 하루가 정신없게 흘러갔다. 갓난아기 때부터 분리 수면을 했던 아이는 갑자기 잠 퇴행기가 왔는지 엄마와만 자려고 했다.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는 나를 폭발 직전으로 몰고 갔고, 결국에는 도망칠 궁리를 하게 만들었다. 백수가 지르기엔 고가의 호텔비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떠나는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이틀 전부터 미열이 났다. 얼마 전 아이가 감기에 걸려 고열에 시달렸는데 그게 옮아 온 모양이었다. 해열제로 응급 처치를 했지만 열이 떨어지질 않았고 점점 악화되었다. 다음날에는 39.7도를 찍었다. 병원을 가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내일은 강릉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호텔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패널티가 어마어마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포기를 몰랐다. 약을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속였다.
결국 나는 강릉행 KTX에 올랐다. 낮부터 와인 한잔을 하려고 새벽에 일어나 해열제도 먹었다. 음주하려면 적어도 6시간 간격을 두라길래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기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몸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니 목덜미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나중엔 두피까지 타들어 가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내리자마자 병원으로 직행했고, 호텔에 들어와 내리 잠을 잤다.
땀을 좀 흘리고 나니 몸이 가뿐했다. 샤워하고 근처에 있는 유명한 짬뽕 순두부를 먹었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해변을 유유자적 돌며 산책도 했다. 아직은 바닷바람이 차가워 간식거리를 좀 사서 얼른 숙소로 복귀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니 마시려던 샴페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독한 술꾼이지만 따서 마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오늘은 참고 내일 마셔야지. 차가운 병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성공한 여성의 샴페인'으로 유명한 뵈브 클리코. 이 말을 어디에서 주워듣고 모임에서 이야기했을 때, 어떤 이는 '성공 참 쉽다.'라며 비웃음 섞인 농담을 뱉었다. 술이 좀 취한 상태였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맞아, 성공이란 이렇게 쉬운데.'라고 긍정적인 사고를 했다. 다음날 곱씹어 보니 기분이 좀 나쁘긴 했지만, 그 뒤로 이 술을 마실 때면 성공이라는 말의 의미를 진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꿈꾸는 성공이란 무엇일까. 돈 한 푼 못 벌면서 고급 호텔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내 모습에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작가 지망생이랍시고, 글로 소득을 꿈꾼다면서 별다른 노력 없이 큰 대가를 원하는 내가 어처구니없게 다가왔다. 몇개의 공모전에서 탈락했다고 우울해할 상황이 아니었다.
올해를 되돌아보면 글쓰기 공모전은 열 군데도 지원하지 않았다. 어디에 무엇을 넣었는지 기억도 안 날 때 수상 연락이 오는 거라고,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라 조언해 주신 작가님이 떠올랐다. 잘난 척하며 비싼 샴페인을 먹겠다고 애썼던 하루가 왠지 벌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좀 정신 차리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뵈브 글리코, 너니?
하고 다니는 모양새만 보면 이미 나는 성공한 여자였다. 글감을 찾겠다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좋은 곳에서 잠을 자고 신용카드도 막 썼다.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겼는데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그냥 사치하는 여성이었다.
술을 안 마시니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진다. 진솔한 대화는 술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오늘만큼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계획된 글을 쓰지 못해서 두서없이 속 마음을 꺼내본다. 샴페인은 마시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나에게 취해보는 밤이 되길 바라며, 혼자 물 잔으로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