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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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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r 13. 2023

없으면 없는 대로(+11day)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여행이지 않을까.

'갑자기 찾아온 추위 따위는 설렘을 이기지 못한다.'는 낭만이 객기가 되는 순간




만에 마주한 명한 아침.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춥다.'는 일기예보는 가볍게 무시하고 맑은 공기와 하늘에 마음이 봄 봄다. '차가움쯤이야.' 하며 외투는 거추장스러우니 숙소에 두고 나온다.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다. 거친 파도소리가 머릿속까지 깨끗하게 씻어가는 것 같다. 코로나 이후 본의 아니게 길어진 머리카락은 허리 밑까지 여행지이기에 가능한 양갈래 땋은 스타일로 다녔는데, 오늘은 머리카락에도 자유를 주고 싶다. 거센 바람에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신이나서 아주 가관이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차가운 바람이 스쳐가면서 주는 해방감이 묘하다.


바다를 보며 걷던 나의 시선이 오늘따라 하늘로 향한다. 파란 하늘에 아주 가끔 지나가는 구름을 보니 예뻐서 사진기를 연신 '찰칵'거려 본다. 하늘을 보며 듣는 파도소리는 더없이 깔끔하게 맑다. '이정도 추위면 드로잉카페까지 걸어갈 수 있겠다.' 싶어 버스정류장 대신 해안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이정도 추위가 이런 추위가 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외투를 챙겨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숙소로 가고 싶지는 않다. 과한 자유에 이성을 잃은 머리카락을 얌전히 정돈하고 모자를 눌러쓴다. 스카프도 꺼내 모자 위까지 둘둘 감는다. 한결 따뜻하다. 낭만이 객기가 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이번엔 '백드롭페인팅'에 도전한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따뜻한 음료 서비스로 준다. 실내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 밖 보니, 가차없이 흔들리는 나무도 거칠게 부서져 흩어지는 파도도 자연의 평온함일 뿐이다. 여유 있게 차를 마시면서 '어떻게 그릴까' 구상을 하고 하늘, 바다, 유채꽃의 느낌을 담아 캔버스를 채워간다. '나이프'라는 걸 처음 사용해서 그런지 낯설지만 묘한 재미가 있다. 배경의 느낌으로 쓱쓱 채워가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빠르다. 전체적 화폭은 채워졌고 마지막 유채꽃만 표현하면 된다. 생각처럼 표현되지 않아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백드롭페인팅이 완성되었다. 지난주 3시간이 걸려 완성된 작품에 비하면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은 작품이지만 썩 마음에 든다.


뿌듯한 작품을 손에 들고 미술관을 나서니 실내에서 보던 자연의 평온함은 여과없이 현실의 매서움으로 돌변한다. 다시 마주한 성곽을 보니 성곽 안 유채꽃밭에서 내가 그린 캔버스를 놓고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 성곽 안으로 들어가니 여행 드로잉을 하고 있는 2명이 멋진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솜씨가 전문가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에겐 내 그림이 가장 값진 것이니 무심한 척 유채꽃밭에 캔버스를 배치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재빠르게 정리를 하고 여유롭게 돌아 나온다. 역시 사진 속 그림은 내가 그린 작품 이상을 선물해 준다.

 

바람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숙소는 온기 가득한 포근함으로 나를 맞는다. 한달살이를 위해 머물고 있는 내 방은 익숙함으로 가득하다. '내 모습을 담아 사진을 찍을 것도 아닌데'하며 옷은 몇 벌 챙기지 않았다. '무겁다'며 화장품을 챙기는 대신 민낯을 택했다. 그러면서 홍차, 꽃차, 드립백 등 다양한 티들과 달다구리들 그리고 홍차잔, 휴대용 전기포트 등의 티용품 한가득, 인센스 스틱부터 스피커까지 휴식에 필요한 것들은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공간을 채웠다. 이렇게 익숙한 것들로 여기저기 채워진 공간에 '희야'와 '큘러스'가 자리를 잡고, 정성과 손길이 닿은 그림들도 하나, 둘 놓이면서 어느샌가 이곳은 나의 서재를 닮아간다.


낯선 공간에 정을 붙이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익숙한 것들이 참 좋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낯섦이 주는 불안하지만 설레는 어떤 것, 불편하지만 새롭고 흥미로울 수 있는 어떤 것의 기회를 방해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친숙함에 갇혀 있을 거면 그냥 집에 있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숙소를 둘러본다. 굳이 없어도 되는 것과 꼭 필요한 것들로 나눠보니 대부분의 물건들이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이다. 여행은 익숙하고 친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놓이는 낯섦인데.


 '없으면 없는 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살아도 된다. 살아진다. ' 던 말의 의미를  단순히 해석하며 , '굳이 편하게 지 수 있는데, 뭐 하러 불편하게 살아요.' 라던 그때의 내 말은 이제야 정답을 찾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여행이었을지도.





집에서 가져온 티를 복하게 음미하며 글을 쓰고 있는 모순 가득한 하루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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