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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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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r 14. 2023

머무르다.(+12day)

머문다는 건 멈춰 선다는 것

빠르게 걷든 느리게 걷든 움직임은 스쳐감을 의미할 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정류장에 붙은 버스 시간들을 무의미하게 살펴보는데, 버스를 기다리고 계신 아주 연세 많으신 어르신께서 말을 건네온다.


"어디가?", "비자림에 갑니다."

"뭐 하러 가? 일하러 가? 구경하러 가?", "구경하러 갑니다."

"왜 혼자 왔어? 남자친구랑 같이 와야지?", "하하하, 그러게요."

남편이 아닌 남자친구라는 어르신의 표현이 낯설다.

"몇 살 이가?", "하하하, 좀 많습니다."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다.

"몇 살이가?", "마흔 넘었습니다."

"많네. 애들도 있겠네.", "결혼을 안 해서 아이도 없습니다."

"결혼하기 늦었네.", "그렇지요? 하하하."


그리고 이어지는 어르신의 비자림 이야기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자세히 듣고 싶은데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단지 어르신의 깊은 눈동자를 보며 최선의 집중을 할 뿐이다. 곧 버스가 오고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버스를 탄다. 세월의 저만치 앞에 서계신 어르신 눈에는 '서른이나 마흔이나 다 젊어 보이실 테니 남자친구라는 표현을 쓰셨나.' 착각은 자유니 내심 기분이 좋다.


비자림에 도착해 매표소에서 표를 끊는데, 직원이 24세 이하 할인에 해당되는지 묻는다. 지난번 왔을 때는 묻지 않았는데 또 기분이 좋다. 짙게 가려진 매표소 유리 넘어로 양갈래 머리를 하고 철 지난 꽃무늬 가방을 멘 내 모습이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특히, 버스에서 내려 마스크 벗는 것을 깜빡한 덕분에 가면효과를 본 것같기도 하다.


의미 없이 던져진 타인의 말이지만 '나만 좋으면 됐지' 하며 기분 좋게 비자림을 걷기 시작한다. 두 번째 오니 더 좋다. 숲 속에 빠져들어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니 지난번 봐뒀던 명당 자리가 보인다. 신발을 벗고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한 차 한잔으로 울창한 숲의 차가움을 달랜다. 가만히 눈을 감아보기도 하고 멀리 있는 숲 속 어딘가로 초점 없이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면서 한참을 머문다. 머물러 진다.


눈을 감고 명상자세로 앉아있는 나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닥임도 들린다. 인기척이 멀어지고 얼핏 고요한 듯  숲 속은 다채로운 소리와 끊임없이 움직여지는 존재감으로 가득하다. 머무러야 느껴지는 깊이다. 몇 바퀴 계속 걸을 생각이었는데 한 곳에 오래 머물러서인지 으슬으슬 몸이 차가워져 숲 속을  걷기에는 무리다. 아니 더 걷지 않아도 충분히 산책을 한 충만함이다.


오후가 되어서야 만난 바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푸르름을 눈앞에 펼쳐준다. 그동안 봤던 바닷빛 중에 연코 최고의 빛깔이다. 넋을 놓고 있다가 사부작사부작 걸어 들어간다. 바닷물이 제법 빠져나간 모래사장에 발을 내딛는다. 바닷물이 빠진지 오래된 모래들은 단단한데, 조금 전 바닷물이 빠져나간 모래는 신기하게도 갓 구운 빵처럼 폭신폭신 발이 스르르 스르르 빠진다. 폭신한 모래사장을  암석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계속 와~ 와~ 와~만 연신 내뱉으며 바다를 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멍이다.


'내가 이런 시간을 보내려고 여기 왔었지.' 온전한 쉼과 함께 막연한 흐릿함을 선명한 의식으로 찾고자 떠나온 한달살이건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바쁘게 일정을 잡고 움직였던 건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 쉬지 못하고 움직였던 나를 발견한다. 빠르진 않아도 거북이 같은 부지런함과 나무늘보 같은 더딤으로 어떻게든 움직이며 살아온 습관도 이젠 놓아보고 싶다.




온전한 쉼배워야 하는 하루사리는 머무는 방법부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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