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는 엄마도 아빠도 전혀 닮지 않았다.사진으로 본 '친할머니의 어릴 적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외모는 아니지만 성향과 성격은 참 많이 닮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괜찮다.' 싶은 면의 대부분은 엄마를, 이런 부분은 '동전의 양면 같다.'싶은 면의 대부분은 아빠를 닮은 나에게 '엄마는 인생의 지표'가 '아빠는 삶의 타산지석'이라 생각했다.
그가 제주도에 오고 싶단다.'굳이 지금 오시지 말고,한달살이 끝나는 날에 맞춰서 오시면 렌트해서 원하시는 여행일정 잡아볼게요.'라는 권유에도 '굳이 숙소 있는데 뭐 하러 또 다른 숙소를 잡냐'며 내가 머무는 기간에 오신단다.1인실로 예약했던 룸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침대가 2개가 된 결과다. 썩 긍정적이지 않은 딸의 반응에 '그럼 됐다.'하시며 통화를 끝낸다. '너무 매몰찼나?' 싶어 비행기표를 끊어드렸고 며칠 제주에 머물다 가셨다.둘만함께한첫여행이다.
여행사 안성맞춤 스타일의 그와 휴양스타일의 나는 평소에도 그렇듯맞는 게 하나도 없다. 그에게는 심심한 일정을 나에게는 빡빡한 일정으로 나름 무리없이 잘 보냈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태워드리고 집까지 도착하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온전히 혼자 남겨졌다.
모든 것이 리셋되고 뒤죽박죽 처음 바다를 본 날로 되돌아간다. 바다를 마주할 수 있는 2층 카페에 앉아 2시간 남짓바다만 보면서 생각의 흐름을 그냥 둬본다. '흐르는 대로 두어라.' 했으니.
1시간을 걸어 숙소로 돌아온다. 여전히 거세기만 한 바람에 바람막이 외투가 풍선처럼 부풀고 몸이 휘청휘청한다. 바람 덕분에 가녀린 여인이 되어 노력 없이 다이어트가 된 기분이다. 바람이 잠잠해지면 돌담에 기대어 한참 바다를 보고, 다시 바람이 불면 걷기를 반복하면서 '이 바다는 질리지도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아무 일 없이 그렇게 걸어 숙소로 잘 들어왔건만 빈 방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속절없이 왈칵한다.
다시 무한반복되는 순간들이 스친다. 일상 속에서 뒤집히던 응어리 같던 탁함은 늘 조심조심 가라앉아있기만 해서 작은 일렁임에도 매번 혼탁함을 불러왔다. 그리고 다시 기다리며 거리가 두어지면 가라앉았다가 또 탁함을 반복했다.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무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의식적으로 회피하거나 거리 두기를 했었다. 하지만 제주에 와서 그 탁함들이 조금씩 흘러가며 정화되고 떨어져 나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요 며칠 계속되던 거센 파도처럼 그의 등장은 다시금 거세게 자아를 현실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머릿속을 깊은 심해까지 뒤집어 놓았다. 회피하고 숨을 겨를도 없이 쏟아진 눈물이 멈추고 나서야 선명하게 가벼워진 내가 보인다. 다르다. 당연히 다시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던 뒤엉킨 감정들 중에 일부가 떨어져 흘러간다. 잠잠해진 후 들여다 보는 마음속 깊은 곳은 뭔가 비워진 가벼움이다. 낯섦이 주는 너그러움은 익숙한 관계와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안 보이던 내 마음속 진실의 한 귀퉁이를 발견하게도 한다.
낯선 장소, 이곳저곳 여기저기에서 마주한 그는 완연한 노인의 모습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어 보이는 부모의 뒷 모습을 보는 건 부모의 삶, 나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마음을 아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