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로 10분 남짓한 이웃마을에 '타자기 원데이클래스'가 있음을 발견하고 바로 예약을 했다. 한 때 타자기로 글을 써보고 싶다며 타자기를 구매하기 위해 이것저것 살펴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 시간이 조금 남아 정류장에 앉아 주변을 살펴보니 길 건너편 큰 나무 아래 벤치가 있다. 조금 쌀쌀한 바람이지만 '저 벤치 위에 누워있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설렘이 불러온 낭만인가' 생각보다 춥지 않고 편하다. 누워서 보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제법 운치가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을 보다가 나뭇가지로 시선을 옮기니 앙상한 나뭇가지 빼곡히 새순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앙상한 내 마음의 나뭇가지에도 하늘 보느라 살피지 못한 새순들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일어선다.
예약 시간보다 여유롭게 도착한 작업실은정말 작은 공간이 알록달록 아기자기 예쁜 필기도구들로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공간의 오른쪽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아늑한 2인 작업실이 준비되어 있다. 하얀 쉬폰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사이로 햇살이 가득 들어와 더없이 편안한 딱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작업실이다.
타자기에 대한 설명부터 타자치는 방법까지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작가님은 제주 와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포근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게 20분 정도 설명과 연습 시간을 갖고 따뜻한 차 한잔까지 준비해 주고는 '어렵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라는 말을 남긴 후 작가님도 나간다. 완전한 나의 작업실이 펼쳐진다. 2인 작업실이지만 나 밖에 없다.
정승환의 '사랑에 빠지고 싶다.'노래 가사로 타자 연습을 조금 더 하고, 깨끗한 새 종이를 끼우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마음을 한 번 더 가라앉힌 후 진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에게 쓰는 편지다. 스타카토 느낌으로 경쾌하게 자음, 모음 또는 자음, 받침 쓰기 전 키, 모음, 받침을 집중해서 탁탁탁 한 글자 한 글자를 만들며 써 내려간다. 내가 글을 쓰면서 이렇게 한글의 모든 음절을 신경 쓰며 또박또박 글을 적은 적이 있었나 싶다.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나는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를 생각했을 땐 '나에 대한 연민으로 무거운 느낌의 글을 쓰게 되겠구나' 예상했었는데, 막상 타이핑을 시작하니 나에게 하는 말 하나하나에 밝음과 깨끗함이 묻어난 문장이 완성되고 문단이 된다. 탁탁탁의 마법이다. 이렇게 경쾌하고 힘 있는 타자 소리를 들으면서 무거운 글은 써지지 않는다. 쓸 생각도 도망간다.
한 장 가득 나를 향한 마음으로 채운 편지가 완성되고 시간을 보니 정해진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정말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모르게 집중을 했다. 작은 메모지에 친구에게 글도 쓰고, 책에 줄을 그으며 기억하고 싶었던 문구도 여러 장 쓰고 싶었는데 남은 시간이 짧다.작가님이 조금의 여유를 더 준 덕분에 짧은 문구지만 작은 메모지 3장에 글을 새겨 넣는다.
작업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작업한 것들을 작가님께 전한다. 원하는 색깔의 편지봉투를 고르고, 선택한 실링왁스 조각을 녹여 직접 도장을 찍어 편지를 봉한다. 나를 위한 응원이 필요한 어느 날 열어볼 생각이다. 연습했던 종이와 완성한 3장의 메모지도 정성스럽게 포장해 준다. 책 읽으며 줄 그을 때 사용하면 좋을 것 같은 독특한 연필도 구매한다.
행복함이 충만해서 그런지 이 동네에 더 머물고 싶다. 정말 한적한 시골마을은 따뜻한 온기로 평화롭다. 내 마음이 충만해서 모든 것이 호의적으로 느껴졌던 건지, 정말 좋아서 좋은 건지 모르지만 오늘의 모든 순간은 이방인을 위한 따뜻한 집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