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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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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r 21. 2023

투명한 티팟(+19day)

나를 들여다보는 방법

차를 마시다 보면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해석을 찾게 되기도 한다.




"또도독 탁 탁탁 틱 틱"

빗소리에 눈을 뜬다. 암막커튼을 활짝 열고 창문을 빼꼼 여니 찹찹하고 시원한 공기가 꽤나 상쾌하다. 그래서 오늘의 모닝 BGM은 재즈다. 평일 아침 빗소리를 들으며 이불속에서 '뭐 하지?' 하는 고민을 하는 한량이 된 이 순간이 참 좋다. 스치는 감정조차 미세하게 느끼며 침대 속으로 한없이 꺼지는 몸을 그대로 둔다. 


선곡에 진심인 나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후 자극 없는 뉴에이지 음악으로 BGM을 바꾸고, 나무늘보 모드로 아침을 먹는다. 수프에 빵을 찍어 먹다가 바나나, 토마토도 한 번씩. 끊임없이 내리는 비에 ''도 빠질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것도 없던 머릿속에 생각들이 오른다. 차를 마실 타이밍인거다.  


오랜만에 '일레븐시즈'를 준비한다. 찻잎의 완벽한 펌핑만큼 오늘의 홍차는 향긋하고 깊다. 처음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예쁜 찻잔과 세트가 되는 도자기 티팟에 찻잎을 우려 마시는 게 좋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1인용 티팟에 간단히 찻잎을 우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티팟이 있어도 늘 이것만 사용하다 보니 유리 티팟이 깨지면 똑같은 것을 다시 구매해 사용다.


어떠한 무늬도 없는 깨끗한 유리 티팟은 찻잎의 모든 순간을 보여준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물을 끓여 부어도 펌핑할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무심히 물을 부었는데 펌핑을 시작하며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행복을 주기도 한다. 밀당하듯 까다롭기에 더 좋다.


 전기포트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 휴대용 전기포트를 준비해 왔다. 뭔가 부실해 보이던 휴대용 전기포트는 뜻하지 않은 훌륭함을 가졌다. 중간 부분이 실리콘 반투명으로 된 포트는 물이 끓어오르는 순간을 훤하게 보여준다. 기존 전기포트는 소리로 확인하거나 정성이 뻗을 땐 뚜껑을 열 기포를 확인하면서 스위치를 내렸는데, 이 포트는 기포가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큰 기포가 많아지기 시작하는 순간까지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준다. 그래서 물이 끓어오르기 직전 기포가 뜨는 찰나의 기막힌 타이밍에 스위치를 끄고, 찻잎이 든 유리 티팟에 열수를 부을 수 있다. 이 완벽한 타이밍은 찻잎을 춤추게 하기 충분하다.


펌핑을 준비하기 위해 떠오른 찻잎들이 하나둘씩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유로운 날갯짓을 시작하면 천천히 탕색도 변하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맑은 오렌지빛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다. 그날그날 마음에 따라 탕색이 조금 연할 때 잔에 따르기도 하고, 조금 더 진 탕색 때 잔에 따르기도 한다. 오늘은 탕색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 첫 잔을 따른다. 조금 연하다 싶을 때 잔에 르기 시작해야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홍차가 찻잔에 담긴다. 티타임이 끝난 뒤 남겨진 유리 티팟 속 찻잎을 보는 것도 여운이다.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시작한 여행은 내 마음을 담는 티팟 같다. 일상생활 속에서 예쁜 도자기 티팟에 담겨 있던 마음을 전혀 다른 낯선 공간에 머물며 마음을 유리 티팟에 옮겨 담는 중이다. 겨우 한 달을 낯섦에 머문다고 얼마만큼 옮겨질까마는 그래도 찻잎 몇 가닥 정도 옮겨진 것 같기도.


순간순간 미세하게 또는 급격하게 변하는 감정의 변화를, 마음의 움직임을, 생각의 고리를 요즘처럼 놓치지 않고 들여다본 적이 있던가. 유리 티팟으로 옮겨간 찻잎이 기특하다. 몇 가닥 담기지 않은 유리 티팟이라도 물때가 끼지 않도록 정성으로 닦아본다. 언젠가 도자기 티팟 속 찻잎이 모두 유리 티팟으로 옮겨졌는데 정작 유리 티팟이 물때로 탁하게 얼룩져 있으면 곤란할 것 같으니, 그냥 깨지기 쉬운 용기로 이동한 것뿐 숨길 수 조차 없고 오히려 지저분해지고 왜곡된 나와 마주하면 답도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모든 것에 의미부여를 시작한 하루사리지만 점점 가벼워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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