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비예보가 있는 날, 오전에는 미뤄둔 빨래를 하고 오후에는 라운지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평소처럼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고 창밖을 보니 비가 올 듯 말 듯 한다. 다시 살펴본 일기예보에도 비가 오후로 늦춰졌으니 '1~2시간 안에는 비가 안 오겠지.' 하며 우산 없이 빨래방으로 향한다. 막상 숙소를 나오니 빗방울이 살짝 떨어진다. '말설임은 필요 없다.'라며 그냥 걷는다.
처음 숙소 주변을 둘러보던 날, 빨래방 위치를 확인하고 굳이들어가서 작동방법 및 현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등 사전답사까지 나름 꼼꼼하게 했던 터라 새로운 도전이지만 걱정 없이 빨래방에 들어선다. 한 사람이 이미 빨래를 돌려놓고 자연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 속에 내가 있는 듯 하다. 동전교환기에 지폐를 넣고 동전을 교환한다. 세탁기로 가서 빨래를 넣고 순서에 맞춰 동전을 넣은 후 시작버튼을 누른다.
'잘 돌아가는군!' 내심 흐뭇하게 돌아가는 빨랫감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이상한 것이 맞다. 나의 빨랫감들이 자신감 있게 건조기에서 춤추고 있다. 정지 버튼이 없다. 급하게 벽에 적힌 주인 휴대폰번호를 보고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하니 정지버튼은 없고 그냥 문을 열면 정지가 된단다. 그렇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는단다. 즉, 동전을 날렸다. 건조기에 잠시 돌렸을 뿐인데 빨랫감들이 쓸데없이 뽀송뽀송하다. 가끔 '애는 갖다 버리고 탯줄을 키웠나 보다.' 하시던 엄마 말씀이 아예 틀린 건 아닌 게 확실하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어 세탁기에 넣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긴장감에 정신을 똑바로 챙기고 세탁순서를 재확인 한 후 동전을 넣는다. 세탁기 문도 두 번이나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시작버튼을 누른다.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물이 공급되면서 시원하게 잘 돌아간다.
빨래하는 동안 그림을 그리면 좋을 것 같아서챙겨 온 종이와 펜을 꺼낸다. 숲에 갔을 때 그림으로 그려두고 싶은 풍경이 있었지만 상황이 되지 않아 휴대폰으로 찍어둔사진도 찾는다. 오랜만에 펜을 드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다. '일단 시작하면된다.'던 말이 떠올라 가장 의미를 두고 찍은 나무는 제쳐 두고, 사진 속 끝에 찍힌 내 운동화를 먼저 그린다. 내가 그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니. 운동화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의연한 나무를 그리고, 길을 표현할 때쯤 빨래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 세탁기는 세탁이 완료되어도 집에서처럼 소리로 알려주지 않는다.
빨래를 또 꺼내어 건조기에 넣는다. 잘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그림을 이어서 그린다. 낮은 돌담길도 그리고, 주변의 작은 나무들과 푸르른 녹음까지 그려 넣는다. 그런데 숲 길 전체를 덮고 있는 신비한 그림자는 어떻게 그려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햇살이 스며드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을 감싸고 있는 그림자를 그려 넣다가는 그림이 엉망이 되고 말 것같다. 그림 초보자에게는 무리다.
건조까지 마무리 된 빨래를 꺼낸다. 날씨와 무관하게 뽀송뽀송한 옷가지들은 만족스럽다. 옷가지들을 하나씩 개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정말 헉!이다. 잠깐씩 부슬부슬 내렸다 맑았다 하던 하늘에서 아주 작정한 듯 비가 쏟아져내린다. 걱정한들 뭐 할까 싶어 하던 일을 계속한다. 단지, 아주 천천히 창밖을 응시하며 옷가지를 갤 뿐이다. 다행히 모든 정리를 마치니 비가 살짝 떨어지는 정도다. '이 정도면 5분 정도의 거리는 갈 수 있겠다.' 하는 마음으로 숙소로 향한다. 안경에 빗물이 살짝 묻는 정도니 '타이밍이 좋았다.' 싶다.
비싼 값을 치르고 뽀송해진 옷가지들을 제위치에 정리하고 창밖을 보니 비가 완전 소강상태다. '10분 정도만 기다렸다가 움직였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스치다가 '뭐 어때, 잘 왔으면 되었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소나기를 피해서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