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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Apr 28. 2024

후두두두

없는데 있다.

회전이 멈추는 순간 텅 빈 세탁기 안으로 빨랫감이 후두두두 떨어진다.




작년 언젠가 초원느낌의 카펫을 구매했다. 화면으로 볼 때마다 너무 예쁜데 집에 둘 곳이 없어 며칠을 고민하다가 기어코 필요한 곳을 찾아 구매한 것이다.


아주 만족스럽게 카펫을 깔고 흐뭇해하는 나와는 달리 타인의 반응은 매번 생경스러워했다. 부엌에 들어서면 굳이 실내화를 벗고 싱크대 밑에 떡하니 펼쳐진 커다란 초원 카펫 위를 맨발로 디디며 폭신폭신 보들보들 혼자만의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좋으면 되었지' 한다.


설거지를 하는데, 다용도실 가리개 커튼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해 보니 이사 오고 한 번도 세탁을 하지 않았다. 유난히 꼬질꼬질 해 보이는 기분 탓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고정 핀을 빼고 바로 세탁기에 넣는다. 굳이 빨지 않아도 되는 몇 개의 빨랫감을 추가해서 30분 코스를 선택하고 세탁기 앞에 서 있는데, '할 일도 없고 세멍이나 하자' 싶다.


쭈그리고 다용도실 앞에 앉으려는데 뒤쪽 주방에 깔려있는 카펫이 눈에 들어온다. 싱크대에 기대어 초원 카펫에 앉아 세탁기 돌아가는 것을 본다. '이 아늑함은 무엇인가! '혼자 사는 집에서 나만의 아지트를 새롭게 발견한 기쁨이다.


격정적인 액션에 간간이 드라마틱한 전개가 펼쳐진다. 30분 단편 영화 "세탁의 세계"를 보노라니 시간이 순식간이다. 아쉬움 가득한 세탁의 세계가 끝나갈 무렵 화면 속이 텅 빈 채로 블랙홀이다. 살살살 빨랫감을 달래며 흩어지게 해 놓고 속도를 내던 세탁통 안이 텅 다. '내 머릿속도 멍하니 텅 비어가는구나' 하는 찰나에 세탁통이 멈추고 세탁통에 감쪽같이 찰싹 붙어 있던 빨랫감들이 후두두 떨어진다. 아차!


데 있다. 내 머릿속처럼.




초원 카펫을 꼭 사야 했던 선견지명의 하루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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