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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Jan 02. 2022

나를 닮아서

삶은 나이만큼의 제곱으로 살아내는 것

건강한 게으름뱅이로 산다는 건 어쩌면 가장 불가능한 희망사항일 수도...




절대 부지런하지 않은 천성 이건만 성실한 게으름으로 타인에게는 일상다반사 혼자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하지만 혼자만의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나는 올 한 해 신년 목표를 건강한 게으름뱅이로 정했다.


1월 1일 때마침 주말 아침, 해가 중천이려니 기분 좋게 눈을 떴는데 7시 30분이다. 다시 눈을 감는다. 늦잠을 잘 자지 않는 습관으로 인해 첫날부터 나의 신년 목표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부비적 부비적 뒹굴뒹굴 깜빡 잠이 들었다 다시 일어난다. 긴 스트레칭을 하며 흐느적흐느적 일어난다. 침실을 정리하고 집 안 모든 문을 활짝 연다. 따뜻한 실내로 차가운 겨울 공기가 순식간에 밀려온다. 차갑지만 상쾌한 새 해 첫 깊은숨이다.


창문을 닫으려는 찰나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퍼지는 맑고 투명한 풍경소리에 멈칫한다. 풍경 옆에 자리 잡은 틸란이가 어김없이 시선을 끈다. 애착 식물인 틸란이는 몇 년째 나와 새해를 함께 맞이하고 있다. 훌쩍 커버린 녀석을 보면 왠지 묘한 기분이 든다. 풍성한 머릿결을 한껏 부풀려 '나 다 컸어요' 하는 것 같아 내심 섭섭하다. 혼자 너무 잘 커서 심술이 날 때도 있다. 아침밥을 먹지 않은 채 움직여본다. 평생 휴일에도 거르지 않는 아침밥을 올해는 거르기도 하고 늦게 먹어보기도 하련다. 출근하지 않는 휴일에만 할 수 있는 게으름이니 말이다.


화장대 의자를  거실 창가로 옮겨 의자 위로 올라가 커튼 고리에 달려 있는 틸란이를 내린다. 틸란이가 다치지 않게 왼손을 높이 들고 오른손으로 의자를 다시 든다. 침실 창가에 의자를 옮겨 놓고 침실 창가 봉에 달려 있는 틸란이도 내린다. 두 녀석을 대야에 담는다. 대야에 넘칠 정도로 풍성한 머릿결을 자랑하는 녀석들 위로 물을 틀어준다. 그리고 금세 알아차린다. 물을 만나면 순식간에 풍선 바람 빠지듯 숨이 죽어버리는 틸란이는 가녀린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허상이다.  높이 매달려 있던 틸란이의 한 올 한 올 풍성한 은빛의 반짝임은 분명 빛이 났건만, 그 모습에 이끌려 다가가 조심스레 쓰다듬었건만, 손끝으로 전해지는 보들보들 하늘하늘 깃털처럼 가볍고 건조한 푸석임에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외면했는데, 늘 목말라요 목말라요 하는 애처로움도 외면했는데, 대야에 물이 한가득 찼건만 틸란이는 대야의 반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은 채 볼품없이 잠겨있다.


틸란이를 뒤로하고 주방으로 향한다. 동글동글 아직도 싱그러움을 가득 머금은 동글이 '디시디아'를 살며시 손에 들고 베란다로 돌아와서 틸란이 옆에 자리를 만들어 풍덩 담가 둔다. 동글이는 몇 달 전 지인과의 약속 장소를 향하던 중 우연히 마주한 꽃집에서 만난 아이다. 창가에 달려 있는 이 녀석을 본 순간 새 식구가 되어야겠구나 싶어 망설임 없이 려온 아이다. 처음엔 한 녀석만 려오려 하였으나 짝꿍을 옆에 두고 오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나란히 걸려있던 두 녀석을 모두 려왔다. 이미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자리 잡은 많은 식물들 틈에서 동글이들의 자리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마음 붙일 곳을 찾던 동글이들은 지난주 주방으로 둥지를 틀고 나서야 안착을 하게 되었다. 딱 있어야 할 곳을 만난 것이다. 차 도구로 채워져 있는 주방의 한켠에 자리 잡은 동글이로 인해 찻자리를 준비할 때마다 그 싱그러운 초록이 어우러져 더없이 행복한 장소가 되었다. 자기 자리인 거다. 틸란이와 함께 생활을 시작했건만 존재감 없이 그래서 성장도 없이 묵묵히 어디든 있던 '이오난사'도 동글이 덕에 주방에 자리를 잡고 안착했다. 딱이다. 이오난사도 살며시 손에 올려 동글이들 옆 물속에 담근다.


페트병에 물을 가득 채워 거실과 방 곳곳에 위치한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나니 또 쓸데없이 분주했구나 싶어 포트에 물을 가득 부어 끓인다. 새로 마련한 트레이를 꺼내고 호랑이가 귀엽게 수놓아진 다보를 깐다. 오랜만에 겨울에 어울리는 티팟세트로 세팅을 하고 오늘은 향긋한 '캔디 스페셜 티'로 홍차를 준비한다. 티팟에 뜨거운 물이 담긴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설레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포트에 남은 뜨거운 물을 워터저그에 가득 모두 담는다. 이 물을 다 마실 때까지는 나만의 시간이니 방해받지 않겠다는 행복한 철벽이다. 아침 겸 가벼운 달다구리도 빼놓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도 늘 혼자만의 시간이 목마른 자신을 느끼며 서재로 자리를 옮겨 더없이 편안한 자리로 세팅을 하고 오롯이 사색할 수 있는 BGM을 깐다. 완벽하다. 담요를 덮고 창문을 조금만 연다. 따뜻한 공간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왼쪽 한 뺨에만 스친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뻥 뚫리는 상쾌함은 겨울에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함이다.


또로로록 뜨거운 찻물을 잔에 따른다. 맑고 깨끗한 색을 뒤로하고 향긋한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이보다 행복할 수 없는 설렘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는다. 차가운 바람결이 얼굴에 스칠 때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따뜻한 향기가 숨 깊이 들어온다. 뜨거운 차가 목을 타고 심장까지 닿는다. 따뜻한 담요 속에서 몸은 포근하건만 손끝은 차갑다. 차가운 손끝으로 뜨거운 찻잔을 살포시 감싸 본다. 그냥 좋은 건 이런 거다 싶다. 그렇게 몇 시간을 멍하니 때로는 이런저런 밑도 끝도 없는 가벼운 상념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며 나만의 충전 시간을 정리한다.


베란다로 향한다. 이 추위에 차가운 물에서 얼마나 고생일까 하는 걱정 어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릇함을  뽐내며 충분한 수분 공급을 마치고 다시 싱그러움으로 무장한 틸란이와 더 싱그러워진 동글이가 있다. 늘 어디든 있는 이오난사도 있다. 동글이와 이오를 살며시 들어 물기를 빼기 위해 바닥에 두고 틸란이를 들어 올린다. 가벼웠던 줄기는 물을 가득 머금어 아주 묵직한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이 순식간에 빠지면 그래도 무거운 틸란이를 빨래건조대에 걸어둔다. 꼬들꼬들 해조류처럼 싱그러워진 모습이 예쁘기 그지없다. 그 사이 어느 정도 물이 빠진 동글이와 이오를 자기 자리로 옮긴다. 일주일 동안 거뜬히 자신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채 주변을 밝힐 것이 분명한 아이들이다.


몇 시간 뒤 다시 베란다로 향한다. 언제 꼬들꼬들 싱그러웠냐는 듯이 가벼워진 틸란이가 있다. 다시 물에 담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참는다. 그러면 끝이 없을 테니 말이다. 허상이라도 좋다며 틸란이의 만져준다. 구석구석 흔들고 가벼워진 머릿결이 볼륨을 찾을 수 있도록 정성을 들인다. 은빛을 내며 풍성해진 틸란이를 원래의 위치에 걸어 둔다. 오래 함께 있으면서도 요즘 들어서야 발견한 뭔지 모를 애처로움도 함께 걸어둔다.


다시 베란도로 돌아온다. 집에서 유일하게 지저분한 베란다 바닥을 본다. 틸란이에게서 떨어진 작은 줄기들이 수 없이 흩어져있다. 예전 같으면 모두 쓸어서 정리를 하고 청소를 했겠지만 대야의 물을 쏟아버리는 정도로만 정리를 하고 작은 줄기들이 그대로 말라가든 그냥 둔다. 왠지 그러고 싶어서 그냥 둔다.


똑같은 시간 동안 같은 물에 담겨 충분히 갈증을 해결해 준 것 같은데, 늘 충족되어 있는 동글이와 늘 목마른 틸란이를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해마다 애쓰며 아무리 간결한 삶을 살기 위해 관계도 물건도 비우고 비워도 뒤죽박죽 잡동사니로 가득했던 과거보다 가벼워지지 않는 현재만 있다. 나이에 붙는 숫자만큼 무게 자체가 달라지는 삶을 느끼며 틸란이를 닮은 내가 보인다. 그래서인지 점점 더 나를 찾는 시간이 절실해지고 아무리 충전의 시간이 주어져도 부족하고 금세 갈증이 난다. 해소할 수 없는 갈증도 내 벗이건만 아직은 손절 중이다.




어차피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메고 뛸 필요까지야 없지 않겠냐며 하루사리는 아예 기어가기에 도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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