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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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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Apr 17. 2022

차가운 꽃비

설렘을 잃어버린 그런 봄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 몽글몽글한 설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의 봄이 시작된다.




봄은 사랑이다.


나의 봄은 벚꽃에서 시작해서 꽃비로 끝나는 짧지만 강렬한 계절이다. 무던해서 감정의 기복이 많지 않은 성격임에도 봄은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다. 벚꽃이 빼꼼 인사하는 순간부터 영혼의 가출이 시작되어 평소보다 빨리 집을 나선다. 조금 더 천천히 벚꽃 가로수길을 드라이브하며 이대로 계속 어디론가 가고 싶은 충동을 즐기며 출근한다. 더없이 정확하게 칼퇴를 하고 벚꽃 가득한 근교의 언덕을 산책한다. 천천히 천천히 오늘이 마지막인 듯 온몸으로 몽글몽글 봄을 느끼며 걷는다.


꽃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출근길의 꽃비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계속 계속 달리고 싶은 짜릿함만으로도 충만했던 꽃비를 맞으며 도착한 건물 입구에서도 한참을 봄 공기를 마셔본다. 세상 놀랍게 서둘러 칼퇴를 하고 봄 언덕으로 향한다.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피크닉 용품을 한가득 안고 벚꽃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넓은 돗자리에 누워 하늘을 본다. 꽃비 내리는 봄 하늘은 세상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꿈같다. 이렇게 나의 봄은 1년의 모든 설렘을 폭발시키는 계절이다.


계절이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습관적으로 벚꽃 길을 걸어본다. 꽃비가 쏟아지는 언덕길도 걸어본다. 차갑다. 가슴속에 차가운 눈이 스쳐가듯 시리다. 흩날리는 꽃비만큼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휘몰아치는 낯선 봄의 시작이다. 아무렇지 않아 오히려 믿을 수 없던 나의 일상이 '아무렇지 않음'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


병실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두 손을 꼭 잡고 있던 그 순간에도 눈치 없는 딸은 엄마의 마지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혼자 세상을 살기에는 강하지도 못하고 마음이 여려서 어떡하나' 하시며 걱정하시던 엄마의 눈빛은 마지막 순간에도 딸 얼굴만 보며 눈을 감지 못하셨다. 그렇게 초점을 잃어가는 엄마를 보면서도 엄마를 외치던 딸은 엄마의 마지막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준비도 없이 겨를도 없이 그렇게 봄을 앞둔 어느 날 사라졌다.


칼퇴를 하루의 목표로 여기며 거북이의 부지런함으로 하루를 보내던 나는 나무늘보가 되어 칼퇴를 잊은 지 오래다. 항상 혼자였던 집이건만 혼자인 집이 허전하고 낯설다. 혼자서 즐기는 티타임은 소확행의 정점이었건만 습관처럼 차를 마실뿐이다. 피곤한 아침이 싫어 일찍 잠자리에 들던 나는 12시를 넘기기 일쑤다.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리고 본방사수 대신 끊임없이 정주행을 한다. 중독처럼 눈과 귀에 자극을 주며 잠을 자지 않고 잠이 쏟아져도 버틴다. 주말에도 늦잠을 잘 자지 않던 나는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난다. 일찍 눈을 떠도 다시 잔다. 멍하니 누워서 깨다 자다를 반복하다 정오가 되면 일어난다.


그럼에도 난 평온한 일상을 산다.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도 나누고 해야 할 몫도 기꺼이 하며 살고 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였던 일상이었기에 변화 없이 일상이 살아질 뿐 애쓰지 않는다. 혼자일 때면 문득문득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고 찌릿찌릿 가슴이 아플 때도 있으나 이 또한 그냥 둔다. 슬프면 슬픈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산다. 지인들도 묻지 않는다. 가끔 어떤 상황이 되어 조심스레 괜찮냐고 묻는 이들이 있으면 괜찮다고 한다. 그러고는 나에게 다시 묻는다.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은 게 맞는 건지. 그러고 보니 난 괜찮지 않다. 단지 '괜찮지 않지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봄이 다가와서야 알아차렸다. 여전히 눈치 없이. 혼자 걷던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살던 집은 혼자만 존재하던 집이 아니었다.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던 일상은 이제 온전히 혼자인 삶이 된 것이다.


인생의 지침서였던 그리하여 존경했던 유일한 존재가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 같은 하루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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