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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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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r 05. 2023

짙은 푸르름의 무게(+3day)

버겁지 않을 만큼이면 아직은 괜찮은 것 같기도

온전히 들어주는 이 없는 부재는 글밥 많은 글을 쓰게 한다.




완연한 봄날씨에 외투는 걸어두고 한층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선다. 오늘은 이웃 해변까지 걷자 싶어 어제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특별히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숙소 뒤편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내가 생각하던 제주스러움의 돌이 펼쳐진 소담한 동네가 있다. 어른신들만 계실 것 같은 한산한 동네를 지나 낯선 해안길을 걷는다. 그리고 어제와 전혀 다른 느낌의 바다 있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 감동하며 걷던 어제까지의 바다와다른 짙은 푸르름의 무게가 느껴지는 깊은 바다다. 덩달아 무언가 묵직한 감정이 내려앉는다. 그저 평온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바다이건만 존재만으로 무겁다. 한참을 그 무게 속을 걷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텅 빈 것인지, 꽉 차서 틈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내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이 없다.


빨려들 듯한 맑은 짙음에 하염없이 머물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안 가까이로 옮겨진다. 해안 가까이로 밀려올수록 잔 파도 굵은 파도가 되어 암석에 부딪혀 흩날린다. 잔잔한 출렁임인 줄 알았던 물결도 어김없이 암석에 부딪힐 땐 작은 파도가 되어 흩날린다. 흩날렸던 파도의 거품은 잦아들어 돌 사이 얕고 투명한 평온함으로 남는다.


어떻게 하면, 언제쯤이면  깊이가 짐작되지 않는 마음의 무언가가 내가 알아차릴 수 있게 나에게로 가까이 가까이 밀려와 일렁이고 부서지고 흩날려서 사라질까. 용기를 내고 싶지만 그 용기조차 어떻게 내야 하는 건지도 언제쯤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욕심스럽게 거센 도는 견딜 여력이 없을 것 같으니 잔잔한 파도로 일렁이며 사부작사부작 부서져줬으면 하고 바라본다. 미동조차 느낄 수 없는 나의 바다는 여전히 짙은 푸르름 속의 고요한 바다인데.


조금 더 걷다 보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이 보인다. 엄마와 아이가 모래놀이를 하는 모습은 지금 이 세상 가장 행복한 모습이다. 슬슬 허기가 느껴진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맛집투어는 접기로 했으니 지금 먹고 싶은 걸로 정한다. '당근케이크' 커다란 글자가 보인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당근케이크를 기대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해안가어김없이 블로그에서 봤던 카페들이 보인다. 이쁘긴 한데 차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걸 보니 순간 벅적임이 싫다.


크고 투박한 나무간판, 하얀 종이 "당근케이크" 딱 다섯 글자. 사람의 흔적도 주차 중인 차도 없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정원이 예쁘다. 오늘의 감을 믿고 들어선다. 소품 하나부터 식물 하나하나까지 정성이 가득 묻어난 공간, 이렇게 작은 공간을 이렇게 풍성하게 꾸며놓을 수 있다니. 카페 주인조차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주신 덕분에 오롯이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시간은 더없이 충분했다. DSLR카메라가 아닌 휴대전화를 꺼내 한 컷 찍는다. 빈 접시에 담긴 이 순간의 충분함은 계속 되새기며 꺼내보고 싶을 것 같으니.


해변의 에메랄드 바다에 한 번 시선을 주고 다시 왔던 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금세 짙은 푸르름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의 충만함과는 결이 다른 묵직함이 다시금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버겁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에서는 '흐르게 놔두어라.'라고 는데, 흐르게 놔두는 방법을 모르는 하루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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