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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03화

DSLR(+2day)

의미 없는 사진에 의미를 담아 찰칵!

by 하루사리

10년도 전에 샀던 DSLR카메라를 크로스로 장착하고 나선다.




휴대폰 카메라의 뛰어난 성능과 휴대성 등의 이유로 자연스럽게 서랍 속으로 잊혀졌던 카메라를 제주까지 모셔왔다. 화면이 작아서 사진을 찍은 후 확대해서 좌우로 움직여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도, 파일을 추후 노트북으로 옮길 때까지의 기나긴 답답함도 안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끝난 후 노트북으로 보는 사진의 느낌이 확실히 다르기에, 한 발짝 물러나 다시금 사진 속 시간이 들여다봐지는 느림의 깊이가 다르기에, 매 순간 찰칵! 하는 아날로그적 짜릿함이 그리웠다.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의미 있는 순간마다 셔터를 누른다. 비행기 티켓도 찰칵! 걸어가는 두 발도 찰칵! 유리창에 비치는 카메라를 든 모습도 찰칵! 이렇게 의미 있는 순간마다 찍은 사진이건만 사진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발견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전히 홀로 맞이한 생일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빛나는 화창한 날씨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아, 생일 축하해' 마음으로 몇 번이고 말하다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싶어 낯간지럽지만 소리 내어 "~아, 생일 축하해" 말해본다. 소리 내어 내 이름을 부르며 축하한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울컥 목이 메인다. 이 순간의 바다도 찰칵! off.

수플레가 먹고 싶다. 집이었으면 '생일이니 먹고 싶은 걸 먹는게 최고지' 했을텐데, 왠지 미역국을 먹어야 할 것 같다. 미역국이 나오는 식당을 검색해 진수성찬 한상차림으로 점심을 먹는다. 블로그에서는 그렇게 맛있다는데 그냥 그렇다. 생일날 꼭 미역국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여행 오면 안 하던 짓 한다더니 내가 그렇다. 미역국 찰칵! off.


누가 봐도 관광객 모양새지만 동네주민인척 어슬렁어슬렁 여기저기 골목골목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 꽃집 앞에서 하얀 히야신스를 발견했다. 작년에 키우던 다양한 색의 히야신스를 땅에 묻어뒀다가 올 2월에 화분에 다시 심었는데 비실비실 연약해서 걱정 한가득 남겨두고 왔데, 튼튼한 구근에 풍성한 히야신스를 보니 희망차 보인다. 히야신스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 적당한 곳에 놓아둔다. 화분에 "희야"라는 이름을 적어주고 '한 달 동안 같이 잘 살아보자.'라는 작은 문구도 적어본다.


숙소 앞 마트에서 사 온 맥주 한 캔과 딸기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태블릿을 켜 글을 쓰다 찰칵!, 드등 옆에 항상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놓여있는 '희야'도 찰칵! off.


짐을 챙기면서 한 달 뒤 집으로 돌아오면 찍은 사진들로 포토북을 만들어야지 싶었다. '한 달의 기록이 담긴 포토북은 엄청 두껍겠군!' 걱정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누르기 시작한 나의 셔터소리 너머에는 의미가 없다. 사진을 찍은 뒤 잘 찍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off, 다시금 의미 있는 순간을 찍은 후에도 off.


사진을 찍는 지금 이 순간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하다. 찰칵! 하는 순간, 소리가 주는 표현할 수 없는 담백한 짜릿함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찍은 사진을 다시 보지 않을 것 같다. 당연히 앨범을 만들지도 않을 거다. 앨범에 넣을 만한 스토리 있는 사진들은 없을 테니.





찰칵! 되었다 하루사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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