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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숲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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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r 04. 2023

DSLR(+2day)

의미 없는 사진에 의미를 담아 찰칵!

10년도 전에 샀던 DSLR카메라를 크로스로 장착하고 나선다.




휴대폰 카메라의 뛰어난 성능과 휴대성 등의 이유로 자연스럽게 서랍 속으로 잊혀졌던 카메라를 제주까지 모셔왔다. 화면이 작아서 사진을 찍은 후 확대해서 좌우로 움직여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도, 파일을 추후 노트북으로 옮길 때까지의 기나긴 답답함도 안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끝난 후 노트북으로 보는 사진의 느낌이 확실히 다르기에, 한 발짝 물러나 다시금 사진 속 시간이 들여다봐지는 느림의 깊이가 다르기에, 매 순간 찰칵! 하는 아날로그적 짜릿함이 그리웠다.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의미 있는 순간마다 셔터를 누른다. 비행기 티켓도 찰칵! 걸어가는 두 발도 찰칵! 유리창에 비치는 카메라를 든 모습도 찰칵! 이렇게 의미 있는 순간마다 찍은 사진이건만 사진 자체에의미가 없음을 발견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전히 홀로 맞이한 생일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빛나는 화창한 날씨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아, 생일 축하해' 마음으로 몇 번이고 말하다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싶어 낯간지럽지만 소리 내어 "~아,  생일 축하해" 말해본다. 소리 내어 내 이름을 부르며 축하한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울컥 목이 메인다. 이 순간의 바다도 찰칵! off.

  

수플레가 먹고 싶다. 집이었으면 '생일이니 먹고 싶은 걸 먹는게 최고지' 했을텐데, 왠지 미역국을 먹어야 할 것 같다. 미역국이 나오는 식당을 검색해 진수성찬 한상차림으로 점심을 먹는다. 블로그에서는 그렇게 맛있다는데 그냥 그렇다. 생일날 꼭 미역국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여행 오면 안 하던 짓 한다더니 내가 그렇다. 미역국 찰칵! off.


누가 봐도 관광객 모양새지만 동네주민인척 어슬렁어슬렁 여기저기 골목골목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 꽃집 앞에서 하얀 히야신스를 발견했다. 작년에 키우던 다양한 색의 히야신스를 땅에 묻어뒀다가 올 2월에 화분에 다시 심는데 비실비실 연약해서 걱정 한가득 남겨두고 데, 튼튼한 구근에 풍성한 히야신스를 보니 희망차 보인다. 히야신스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 적당한 곳에 놓아둔다. 화분에 "희야"라는 이름을  적어주고 '한 달 동안 같이 잘 살아보자.'라는 작은 문구도 적어본다.


숙소 앞 마트에서 사 온 맥주 한 캔과 딸기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태블릿을 켜 글을 쓰다 찰칵!, 등 옆에 항상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놓여있는 '희야'도 찰칵!  off.


짐을 챙기면서 한 달 뒤 집으로 돌아오면 찍은 사진들로 포토북을 만들어야지 싶었다. '한 달의 기록이 담긴 포토북은 엄청 두껍겠군!' 걱정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누르기 시작한 나의 셔터소리 너머에는 의미가 없다. 사진을 찍은 뒤 잘 찍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off, 다시금 의미 있는 순간을 찍은 후에도 off.


사진을 찍는 지금 이 순간의 의미만으로도 충분하다. 찰칵! 하는 순간, 소리가 주는 표현할 수 는 담백한 짜릿함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찍은 사진을 다시 보지 않을 것 같다. 당연히 앨범을 만들지도 않을 거다. 앨범에 넣을 만한 스토리 있는 사진들은 없을 테니.





 

찰칵! 되었다 하루사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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