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린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강박에 가까운 자기 학대를 표현하기도 하고, 프리다 칼로처럼 잔인한 운명 속에서 희망을 그리기도 한다. 에곤 실레처럼 일그러진 자기 얼굴과 몸을 붓으로 난자해 우울하고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공재 윤두서처럼 화폭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강인한 기개를 그려낸 이도 있다. 모두 자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 내면으로 몰두한 결과물들이다.
시인들도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자아를 들여다본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자기 연민을 토로하고, 서정주는 자신이 종의 자식임을 감추지 않고 헐떡이는 수캐처럼 생명을 이어온 것을 고백했다. 최승자는 스스로 어둠의 자식 뱀이라 칭하면서 사악하지만 꿈을 꾸는 희망을 노래하기도 했다.
소설가는 자기 경험을 녹여 쓴 자전적인 소설을 자주 세상에 내놓는다. 신경숙은 <외딴 방>의 서두에서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 박완서 소설 대부분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광경을 증언해야 하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지운 채 <나목>을 필두로 <엄마의 말뚝>을 비롯한 많은 자전적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시는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 소설은 짜임새 있는 구성과 개연성 있는 서사가 독자를 사로잡지만, 수필은 글쓴이가 직접 독자에게 내면을 보여주고 말을 건넨다는 것에서 진정한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이다. 수필은 솔직함과 부끄러움이라는 양날의 검을 쥐고 평범한 일상 속 자아를 반추한 사려(思慮)의 결과에 공감을 얻어내야 하는 문학인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특별함을 포착하기란, 즐거운 일 속에서 아픔을 건져 올리기란, 분노를 용서로 다스리기란, 눈물 속에서 미소를 길어 올려 모든 이가 공감할 사유를 끌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자신을 미화하고 싶은 유혹과 얕은 지식의 자랑, 조탁한 문장으로 치장하고 싶은 욕망과도 늘 싸워야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지난한 일을 대체 왜 하고 있는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나는 수필가다. 문장으로 나의 본질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수필가가 되었다. 자신을 그리면서 사는 삶은 현실과 본질을 오가며 치열하게 사는 것인 동시에, 이쪽과 저쪽 모두에서 자기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본질을 그릴 때는 현실에서 떨어져 있어 고독하고, 현실에서는 본질을 생각하기에 또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의 본질을 그리기 위해서 기껍게 홀로 여행하기로 한다. 절망과 희열의 두 얼굴이 무시로 교차하는 길을 걷기로 한다.
나는 자화상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