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독

중독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by 마루

한때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 있을 때 본, 아벨 페라라 감독의 영화 <어딕션>은 제목 그대로 중독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중독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의 명언을 비튼 이 대사는 오래전 본 영화임에도 뇌리에 남아있다. 인간은 의지가 박약하면 중독이 되고 중독이 되면 파멸한다는 단순한 플롯의 B급 컬트 영화지만 뱀파이어 영화답지 않게 철학적이고 현학적 수다로 가득 차 있다. 마지막 피 칠갑 파티 장면은 요즘 말로 괴랄하다. 흑백이라 붉은색의 피가 아닌 회색의 피가 낭자한데 색채 면에서는 덜 자극적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흑백의 피는 끈적한 질감이 느껴지는 듯해서 더 섬뜩하다.


뱀파이어가 피에 중독되는 이야기니까 우리네 일상과는 매우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피를 다른 것으로, 이를테면 알코올이나 카페인, 마약, 도박, 게임, 스마트 폰, 연애, 운동 등으로 치환하면 결코 그들(뱀파이어)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일상 이야기가 된다. 사람들은 즐거움과 행복을 얻고 싶어 중독되고, 고통을 피하려고 중독된다. 그런 중독은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공허함을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해결 방법을 찾다가 개구리처럼 서서히 조금씩 삶아지는 것이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되지'라고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지만, 중독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뇌와 몸의 문제다.


만성 위염으로 일 년에 한 번 대학병원에서 검진받지만, 최근에 특히 위통이 잦아져 동네 병원 신세를 자주 졌다. 의사가 처방전을 내줄 때나 약사에게 복약지도를 받을 때마다 '커피 끊으세요!' 한다. 슬의생 선생님들은 저렇게 매정하게 말씀 안 하더니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하루에 작게는 서너 잔 많게는 예닐곱 잔, 종류도 다양하게 마시던 커피를 끊으라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어요'라고 반항하고 싶지만 '네'라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하고 돌아 나올 때마다 서글펐다. 그래 그까짓 것 끊지 뭐. 오기가 난 나는 하루아침에 커피와 결별을 선언했다.


지옥을 미리 가 본 느낌이었다. 코카서스 바위산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을 먹어도 두통과 안구통은 가라앉지 않았고, 뒤이어 오는 무기력증과 졸림의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서 일상생활이 아예 불가능했다. 집에 있을 때는 침대에 누워 지냈고, 수업할 때는 두통약을 서너 알 털어먹고 직업정신으로 버텼다. 분명 내 혈관에는 커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왜 그동안 커피를 즐길 줄 모르고 의무처럼 많은 양을 무의식적으로 찾았던 걸까. 생각해 보면 내게 결핍을 부르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애정결핍일 수도 있고 원래 영혼의 빈자리가 넓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결핍의 반동으로 커피에 대한 욕구의 쏠림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도전과 실패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커피의 양을 서서히 줄이고 디카페인을 번갈아 먹으며 뇌를 속이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 지나니 몸의 금단증세는 줄어들었고 위 통증도 심각하지 않았다. 두 달여 정도 지난 어느 날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과 통증 둘 다 사라졌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을 맞는 낯선 경험도 한 것을 보니 완전히 카페인 중독상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해리포터의 집 요정이 외치던 '도비 이즈 프리!'를 나도 외쳤다. "카페인 이즈 프리!"


그런데, 나는 수업을 하는 시간 외엔 대부분 혼자 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매일 음악 듣고, 책 읽고, 수업 준비하고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인데 이때마다 늘 커피를 손 닿는데 두고 온기를 느끼며 호로록거렸다. 남들은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겐 치열한 저 일과 중의 하나가 없어지니 안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사람이 술을 끊을 때 생기는 손 떨림처럼 하루 종일 마음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빼먹었거나 잃어버린 느낌, 진짜 금단증상이 나타났다.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뤄 하나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던가. 이쯤에서 영화 <어딕션>의 또 다른 대사를 소환한다.

“나는 포기한다. 고로 존재한다.”


커피는 인생이다. 커피 향 속에는 흙의 향기도 체리 향기도 초콜릿 향기도 곡물 향기도, 본래의 쓴맛 속에 신맛도 떫은맛도 달콤한 맛도 고소한 맛도 들어 있다. 내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달콤하고 고소한 맛보다는, 시고 떫고 쓴맛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쓴맛은 현재가 되고 그 쓴맛이 일으킨 힘으로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남들이 볼 때는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 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게 커피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는 수단이자 내 영혼의 비타민이었다.


지금 나는 이삼일에 한 번 커피를 마신다. 중독을 뿌리치려는 이성의 구심력을 압도하는, 본능의 원심력에 굴복한 결과다. 커피를 마시면 위통이, 마시지 않을 땐 두통이 찾아온다. 내가 중독상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향긋하지만 쓴맛을 내는 커피의 양면처럼 내밀한 즐거움과 은밀한 고통을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독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면 지나친 역설일까?

keyword
이전 02화거울 속 낙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