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 TV 여행프로그램에서, 사막으로 간 여행자들이 낙타를 타러 간다. 관광객을 태우려고 줄지어 서 있는 낙타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 낙타는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우아하게 다리를 접어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기는 했지만 비굴해 보이지 않는 그 형형한 낙타의 눈빛을 나는 보았다. 몇 날 며칠 그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점점 더 뇌중에 박힌다.
사람을 태운 낙타는 소리가 없다. 힘들다 하소연할 법한데, 소를 닮아 커다랗고 순한 눈을 껌뻑이기만 할 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도 없다. 성지를 향해 가는 순례자처럼 모래언덕을 서걱서걱 걷는 낙타의 모습은 호수를 유영하는 듯싶다. 그러고 보니 낙타의 긴 목은 수면 위를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백조와 닮았다.
아무도 열사의 땅으로 가라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짐 지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등에 짐을 진 채, 지도 없는 뜨거운 모래 위를 걷는 미련한 동물. 세상이 모두 얼어 바다가 없어졌던 그 옛날, 싸움이 싫어 스스로 가장 척박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원을 적들에게 내주고 대신 찾은 사막엔 경쟁자도 없었지만, 생명도 없었다. 여름 한낮 사구의 온도는 70도, 뜨거운 모래에서 멀리 떨어져야 살 수 있었기에 다리는 점점 길어지고, 털은 두껍게 변해 햇빛을 견디도록 모습을 바꾸었다.
뜨거운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해 진화를 선택한 낙타는,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달리는 것을 포기한다. 태양을 피해 모든 동물이 땅 밑으로 기어들어 갈 때도 고개 돌리지 않고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그 용기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막의 끝에 다다르면 등짝의 무겁던 혹이 줄어들어 홀가분하지만, 목이 탄다.
여행지의 낙타는 관광객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주지만 자기가 태운 사람이 짓궂게 굴거나 괴롭히면 그 사람을 바닥으로 사정없이 동댕이친다. 그 형형한 눈빛에 걸맞은 자존감이다. 생명을 잇기 위해 무릎을 꿇어 너를 내 등위에 태우지만, 나를 조롱하는 것은 참지 않겠다는 사막의 섬 낙타. 그런 낙타는 자신이 떠나온 초원을 누비고 있을 힘세고 영악한 족속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불모의 땅으로 온 것을 후회한 적도 없다. 짐을 지고 다시 사막의 끝으로 떠나기 위해 무릎을 꿇지만, 그 광랑한 눈빛은 별빛이다.
나는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나.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 불리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도심(道心) 앞에서만 무릎 꿇어야 한다. 도심은 비단 바르고 선량한 마음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이다. 작가는 늘 당당해야 하고 말처럼 빨리 달리고 싶은 욕망을 누른 채 가시 선인장을 씹으며 뜨거운 사산을 올라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앵무새의 흉내와 잔나비의 재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낙타처럼 형형한 눈빛이 살아있어야 하는 족속들이다.
나는 수필가.
수필가는 사막을 걷는 낙타다. 아무도 고뇌하라 명령하지 않았고, 누구도 쓰는 생으로 살라 하지 않았다. 여윈 등짝에 문장을 지고 사막의 끝에 닿아도 삶이 윤택해지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짊어진 짐이 무거워서 도망쳤다가도 여기까지 걸어온 길에 미련이 남아 사막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오래 귀 기울인다.
수필가는 자신을 가장 사랑하면서 또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 허접한 글을 쓰고 싶지 않은 자존심은 별보다 높이 걸어 놓았으나, 쓰고 보면 너절하고 잡스러운 글만 쓰는 자기에게 실망해 다시 무너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때론 교활함을 영특함으로 치장하고 조탁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미혹시키고도 싶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낙타 한 마리, 다시 등짐의 끈을 조이며 문장 앞에 마주 앉는다.
수필가는 한 능선을 지나면 또 한 능선, 끝없는 사유의 사막에서 달을 머리에 인 낙타처럼 교교하게 걸어야 한다. 거울 속 낙타는 어느 수필가의 연민(憐愍)한 초상(肖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