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듯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詩 <긍정적인 밥>
시를 쓴 대가가
쌀 두말, 국밥 한 그릇, 소금 한 됫박이다.
정신노동의 대가가 박하지만
시인은 마음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정신적 노동의 가치와
물질의 등가교환을 흡족해한다.
진정일 리가 없다.
아마도 시를 읽지 않는 세상에 대한
체념이자 자조일 것이다.
이 착한 시인은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시가 국밥 한 그릇의 따뜻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더 노력해야겠단다.
여기서 못된 심사를 가진 내 마음이 상한다.
내 글이 알사탕 하나와도 바꿀 수
없어서도, 든 공에 비해 헐한 정신노동의
값어치 같은 거대담론 때문도 아니다.
쌀을 트럭으로 실어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을,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서러워할, 이 따뜻하고 애틋한 시가
국밥 한 그릇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이 시인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시가 아무리 삶의 사족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시인이 이렇게 말하면
나는 어떡하라고.
나 같은 쭉정이 글쟁이를 위해서라도
시인은 앞서 당당해줘야 할 것 아닌가.
살짝 삐치려는 마음이 든다.
...
그런데,
쌀 두말을 수확하기 위해 들인 농부의
노동과, 소금 한 됫박을 얻기 위한
그들의 땀을 떠올려 본다.
햇볕과 바람, 눈과 폭풍우 속에서
온몸으로 일궈낸 노동의 대가가
시인의 노동보다 헐하다고,
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반편이 같은 내 머리와 가슴을 친다.
시인의 말이 옳다.
겸손하고, 삶을 긍정하는 시인의 마음이
내겐 한 그릇의 밥보다 더 따숩고
서러운 위안을 준다.
시는 사람이다,
시인은 삶을 향해 뛰는 가슴이다.
그래서 시인을 家라고 하지 않고
人으로 부른다.
아직 家조차도 이루지 못한 수필家는
섧다.
#긍정적인 밥 #함민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