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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21. 2022

가을입디다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최승자 詩  <가을>




가을 산책길에 은발억새들이 만발이다.

굳이 취향을 얘기하자면 갈대보단

억새가 훨씬 우아하고 운치 있어 보인다.

한낮의 볕은 시간 감각을 잃은 듯 하지만

계절을 알려 주는 지표들은 부지런히

자기 할 일들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쉬는 날이지만 할 일 없는 이는

나뿐인가 싶기도 하고,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 또한

나뿐인가 싶기도 한 그런 날이다.

갈곳 없이 어슬렁 거리는 동네 개를

보는 것처럼 나른한 가을 오후다.


이 십 년째 살고 있는 동네를 옮겨볼까?

다른 도시로 이사 가는 것은 어떨까?

그게 어렵다면 아파트를 팔고

주택에서 살아 볼까?

이른 감은 있지만 늘 소망하던 시골에

전원주택을 자그맣게 짓는 건 어떨까?

가진 돈 아껴 쓰면 죽을 때까지

일을 그만둬도 될까?


요즘 들어 익숙한 것이 싫다.

나이를 먹어가면 안전과 낯익은 것이

좋기 마련인데,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지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동생아, 우리 동네와 옆 동네에

자그만 동네책방이 없잖아?

그래서 조심스레 물어보는 건데

내가 독립서점(?) 동네서점(?) 이런 거

하나 차려서 내 맘대로 추천하는 책들

진열해 놓고, 하루에 한 권이든 두 권이든

팔면독서도 하고 글도 쓰면 어떻겠니?"

라고 평소답지 않게 곱디 고운 말투로 물었다.


전형적인 이과 마인드의

수학선생인 동생은 한 마디 툭 한다.

"굶어 죽기 딱 좋네."

빈정 상한 나는 한 마디 던진다.

"이래서 이과 것들하곤 대화가 안 된다니까!"


이과 것이라서 어디 그럴까. 누가 봐도

굶어 죽기 십상인 생각을 하루 종일 하고

앉았던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이내 풀이 죽고 만다.

무엇인가 시작하면 굉장히 열심히

하지만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한 체질을

갖고 있는 내가 걱정되어서 딴엔 하는

소리리라.


젊을 때는 완벽함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이젠 미래를 생각하며

재본다고 동화의 끝처럼 행복하게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자로 잰 듯이 계획대로 열심히,

안주하며 사는 것을 이젠 그만하고 싶다.


이 가을엔 유독 지금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싶은 욕망이 자꾸 마음을

보챈다.


산책 중에 만난 모든 것들이 가을이더라.


#최승자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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