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산책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 있는화훼단지에 들렀다. 걸어서 30분쯤 거리에 있어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가는 곳이다.밥값은 줄일 수 있어도 꽃을 사는 것은 줄일 수 없는 사람이라, 가격도 싸고 꽃구경도 할 수있는 그곳에자주 간다.
어제 수업시간에 이정보의 '국화야 너는 어이'를 수업하다가 아이들에게 국화가 언제 피는지 물었다. 아이들 왈 '봄이요!' 한다. 요 녀석들은 모든 꽃이 봄에 피는 줄 안다. 하기사 온실에서 사시사철 꽃들을 피워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시간을 내어 아이들에게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꽃 국화의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에서는 “만산(滿山) 풍엽(楓葉)은 연지(臙脂)를 물들이고 / 울 밑에 황국화(黃菊花)는 추광(秋光)을 자랑한다”라고 하며 국화를 음력 9월의 계절감을 나타내는 소재로 썼다. 중양절에국화주나 차를 마시는 것처럼 나도국화를 몇 단 사서 거실에도 서재에도 내방에도 골고루 두었다. 지금도 국화 향기가 온 집안에 흩뿌려지고 있다.
순천만 억만 송이 국화꽃 정원
지난 연휴순천만 국가정원에 간날 마침 억만 송이 국화축제를하고 있었다.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각국 정원에는 대부분 봄과 여름에 피는 꽃들로 꾸며져 있기에 꽃이 거의 다 지고 없었고, 국화만이 제 세상을만난 양기지개를 켜고 있었다.당나라 시인 원진이 국화가 지고 나면 더 이상 꽃은 없다고 읊었듯이 다음 꽃 매화가 피기 전까지는 국화의 세상이리라.나도 국화에 반한 시인들처럼 초가을 바람에 날리는 국화 향에 취해 마음이 휘청거렸다.
봄꽃과여름 꽃들이 한창 예쁘게 피어날 때도 국화는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만의 진가를 보여 줄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결곡한 자태로 진득하게 기다린다. 국화에겐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르익는데 걸리는 자기만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그래서 오상고절은 국화뿐이라고 했는가 보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달아나는 시간을 거머쥐려 애쓰기보단 내 안의 꽃송이를 피울 준비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요즘 가을 산책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국들을 만난다. 그런데 정작 '들국화'라는 이름의 국화는 없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들국화라 뭉뚱그려 불리는 것들도 실은 쑥부쟁이. 수레국화, 구절초 등 저마다 이름이 있는 것이다.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섬세하고 단아한 꽃잎들의 배열은 성실함과 어른스러움이 느껴진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저 혼자 피었다가 저 혼자 지는 들국화는 애써찾아가지 않아도골목 어귀 길섶에지금도한들대며 서있을게다.
화병에 꽂은 국화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아본다. 장미처럼뜨겁고 달뜨게 하진 않지만 사람의 체온처럼은은하고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은가고, 가을에 오직 하나 피는 꽃 국화처럼은근하고 그윽해졌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