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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08. 2023

20년 전 낡은 다이어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술이 몹시 취했고 목이 아프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육교 위를

눈 부릅뜨고 건넌다


내려오면 공중전화부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애인의 가슴 섶을 헤집듯

주머니를 뒤져 동전 몇 개 손에 올린다


새벽까지 갈 것 같던 신호음 

이어 들리는 목소리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수화기를 삼킬 듯이 끌어안고

뜻 모를 말을 게워낸다


거기,

누구 없나요

거기 누구,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 없나요


눈뜨고 일어나 보니 

핸드폰에 찍힌

새 음성메시지 1건 오전 1시 25분

삭제을 눌러 지우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 마루 (2004)




즐거운 일은 바람에 흩어지고 힘들었던 일은 이렇게 글로 남는다. 칭얼거림을 들어줄 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참 픈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글에다 투정 부렸다. 제목조차 붙이지 못한 시를 써 놓고 젊은 나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었었구나. 엄마도 없고 아빠도 잃고 남은 것이라곤 아파트 한 채와 여동생 한 명과 강아지 한 마리, 그렇게 나는 젊은 세대주가 되었었다. 앞으로 누구에게도 투정 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저렇게 꼭꼭 여몄나 보다.


20년 전 다이어리를 벽장 속 낡은 상자에서 찾았다. 다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용케도 하나가 살아남아 있었다. 들춰보니 절절이 힘들다는 칭얼거림밤에 쓴 연애편지처럼 낯 뜨거운 시와 여물지 않은 생의 흔적 같은 메모들 뿐이다. 


올해 여름, 호텔 발코니에서 바라본 해무가 자욱한 통영바다


인생의 바다가 짙은 해무에 휩싸였을 때, 앞이 보이질 않고 혹여 헛디딜까 두려움에 눈물 날 때, 글을 썼다. 누구 하나 읽어 주지 않는 글이라도 쓰다 보면 저 멀리 불빛하나가 보이곤 했다. 이대로 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도 생겼고, 잘 헤쳐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도 생겼다. 칠흑 같은  불빛이 보이지 않아도 걷고 또 걷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글을 쓸 때였다.


사랑을 내다버리고 돌아설 때도 달려와 시를 쓰고 싶었던 젊은 는, 하루하루의 목숨을 연료로 지금 이곳에 도착해 있다. 이제 행복을 가장하지도 않고 다른 이의 호의를 의심하지도, 슬프지 않다고 이 악물지 않아도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지금 나보다 스무 살 어린 다이어리 속의 나에.



브런치스토는 글쓰기가 운동과 같다지만, 내게 글쓰기는 숨쉬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낡은 다이어리는 한 곡의 삶에서 지치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게 한 나의 숨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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