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 특사

광복절만큼이나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 있었으니...

by 세바스찬

여름은 출근보다 먼저 현장에 들어와 있었다. 에어컨은 마치 회사 규율을 따르는 모범 사원처럼, 오전 9시가 되어야 겨우 숨을 뱉었다. 그제야 컨베이어 벨트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현장에 모여 있는 사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마른 숨을 토해냈다. 그 뜨거운 열기는 금세 공기 속에 스며들어, 피부 위에 눌어붙었다. 창문 하나 없는 공간, 벽마다 붙은 커다란 실외기가 요란한 소음을 토해내며 돌아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고, 이곳이 정말 일터인지, 아니면 거대한 온실에 갇힌 식물들처럼 그저 버티는 곳인지 헷갈렸다. 달력 속 ‘8월’이라는 숫자는 붉고 굵었지만, 이곳에서 8월은 결코 여름휴가의 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휴가 금지령의 달’이었다.


그 악명 높은 규정은 7월 20일부터 8월 25일까지, 정확히 35일 동안 발효됐다. 회사가 붙인 이름은 ‘업무 집중 기간’이었지만, 사원들 사이에서는 ‘35일 감금’이라는 은어가 더 익숙했다. 마치 누군가 달력 위에 감옥 창살을 덧그려놓은 듯, 날짜들이 얇은 철창 뒤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바깥은 뜨거운 태양과 바람이 흐르고 있지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여 있었다.


털보 아저씨는 입사 첫해 여름, 아무것도 모른 채 8월 중순에 여행을 예약했다가 인사팀에 불려 간 적이 있다. 인사팀장은 규정집 42페이지를 펼쳐, 마치 판결문을 낭독하듯 냉정하게 읽어 내려갔다. “휴가는 35일 이후에만 신청 가능합니다.” 그 순간 털보 아저씨의 귀에는 ‘30년 뒤 광복이 옵니다’라는 농담 같은 문장이 스쳐갔다. 그는 그저 앉아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떤 힘이 묶여 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올해, 털보 아저씨의 눈은 달력 속 8월 15일에 오래 머물렀다. 붉은 글씨로 새겨진 ‘광복절’. 35년의 쇠사슬이 끊어진 날. 서랍 속 깊이 박혀 있는 미사용 연차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마치 조용히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올해는 내 여름도 해방시킨다.’ 그 결심은 복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처럼 서서히 가슴속을 채웠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콩나물국밥 앞에서 털보 아저씨가 성훈에게 낮게 속삭였다. “8월 15일, 나만의 광복절을 만들 거야.” 성훈은 숟가락을 들다 멈추더니 피식 웃었다. “네? 휴가철 특사라도 받겠다는 거에요?” 성훈은 밥알을 천천히 씹으며 씩 웃었다. “그래. 올해는 반드시 휴가철 특사, 받아낸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단단하게 울렸다.


그때까지 성훈은 몰랐다. 5년 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여름철 휴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털보 아저씨'의 분노의 진심을. 그리고 털보 아저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털보 아저씨의 작전 회의는 퇴근 후, 현장 옆 창고에서 열렸다. 창고 문을 닫자, 오래된 기계 기름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그는 낡은 접이식 탁자 위에 커피 캔과 볼펜, 그리고 뭔가 복사해 온 종이 뭉치를 올려놓았다. “이게 작년 인사 규정집이야. 구멍이 몇 개 있더라고.” 성훈은 그 두툼한 종이 뭉치를 바라보며, 이게 휴가를 위한 작전이라기보다 진짜 전쟁 준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전의 1단계는 ‘서명 운동’이었다. 현장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종이를 돌리고, 오직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사인을 받는 방식.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 규정 중 어딘가에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과반수 동의 시 회사 측 규정을 조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 단, 관리자와 인사팀의 회의 절차를 거칠 것.


창고에 모여든 사원은 50명. 그중 찬성 사인을 남긴 사람은 35명, 그리고 성훈이 서명하자 총 36명이 됐다. 숫자만 보면 힘이 실리는 듯했지만, 전체 공정과 인원수를 고려하면 1/7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털보 아저씨의 머릿속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때 한 사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지인이 지금 재고관리부에 있는데, 그쪽도 35일 감금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제가 연락을 해보죠.” 그러자 털보 아저씨는 한 박자 쉬고, 눈빛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 “부탁합니다. 우리도 이번엔 휴가를 꼭 얻어냅시다.” 그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일종의 선서 같았다. 그렇게 비장하게 시작된 서명 운동은 곧 현장 구석구석으로 번져, 회사 전체 사원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2단계는 ‘게시판 문구 작전’이었다. 하루에 한 줄씩, 사내 게시판에 휴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문장을 붙이는 것이다. 첫날 문구는 ‘35일의 사슬을 끊자’. 둘째 날에는 ‘휴가는 사치가 아니라 필요다’. 셋째 날에는 털보 아저씨가 직접 쓴 문장이 붙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땀은 증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종이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그 문구가 떨어진 다음 날부터 회사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인사팀의 귀에까지 소문이 닿았고, 그들은 곧장 공지를 띄웠다.


[사원님들께 알립니다. 이번 달 물량 주문이 과다하여 모든 회사 지침은 기존대로 유지됨을 안내드립니다. 현재 일부 사원의 행위로 회사 전체에 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신 분은 즉시 인사팀(010-XXXX-XXXX)으로 연락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 공지를 ‘위험 1단계 경보’라고 불렀다. 규정 변경 시도는 즉시 무효 처리되며, 규정 위반 시 해고까지 가능하다는 경고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털보 아저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 날, 업무를 마친 그는 창고로 성훈을 불러 세웠다.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낮지만 단단했다. “이 새끼들이 잔머리를 굴려?


그 순간, 성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번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성훈은 잠시 자리를 뜨고 창고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낮고 차갑게 들려왔다. “박성훈 사원님 맞으시죠? 인사팀 데이브입니다. 몇 가지 여쭙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지금 1층 로비로 내려와 주시겠습니까?” 성훈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이미 회사 밖인데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남성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이어졌다. “지금 창고에 계신 거, 압니다. 내려오시죠.” 그리고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성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회사 로비로 향했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자 검은 양복 차림의 한 남성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성훈이 다가서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데이브입니다. 인사팀 총 관리자죠. 성훈 사원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요.” 그 한마디에 성훈의 심장이 움찔했다. 내 얘기를? 입술이 말라붙어 질문이 튀어나왔다. “저… 혹시 무슨 일로…


데이브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손에 쥔 종잇조각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종이는 심하게 찢겨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몇 글자,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라는 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털보 아저씨가 붙인 문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누가 이런 걸 쓴 걸까요?” 성훈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데이브가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아주 친하신 그분입니까?” 성훈은 본능적으로 데이브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자 데이브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도 알아요. 35일 감금, 현장직 불만, 가정이 있는 몸이라는 하소연까지… 불만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압니다. 그런데 그건 저희 업무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어렵게 이 자리에 오기 위해 노력했고 공부했고 경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현장직 분들은 솔직히 그렇지 않죠. 그냥 돈이 급하니 여기 와서 우리가 정한 규칙대로 일하는 거 아닙니까.


말끝에 미소를 지은 그는 한 박자 쉬고 덫 같은 제안을 꺼냈다. “누군지 말씀해주시면 비밀 보장하겠습니다. 대신 성훈 사원님께는 특별히 휴가 3일을 드리죠. 연휴에 붙이면 최대 5일입니다. 일본이든 제주든 어디든 다녀오실 수 있어요. 나쁘지 않죠?” 순간 성훈의 머릿속에 여행 풍경이 스쳤지만 곧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현장직을 대놓고 깎아내리는 말투, 무언가를 교환 조건으로 내미는 태도.


가슴속에 서서히 화가 차올랐다. 두 손이 주먹을 움켜쥐었고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데이브는 그 모습을 흘끗 보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보단 흡연장으로 가실까요? 담배 피우시죠?


흡연장으로 간 성훈과 데이브. 데이브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성훈에게 한 개비를 건넸다. 포장을 뜯은 지 얼마 안 된 새로 나온 담배였고, 그는 “국내에서 제일 센 겁니다”라며 웃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성훈은 가슴속에서 아직 가라앉지 않은 무시 발언의 여운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지만, 첫 모금에서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뜨겁게 타올랐다. 성훈은 연신 기침을 했다.


데이브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야, 담배 처음 피시나요? 여기 다니시면 언젠가 피우게 됩니다.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거든요. 저도 입사하고 나서 시작했어요.” 그 말에 성훈은 계속 고개를 숙인 채 기침만 했다. 데이브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성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자, 사원님. 어떠신가요? 지금 당장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기침 끝에 눈물이 맺힌 성훈은 데이브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강수철 사원님 맞나요?” 강수철… 털보 아저씨의 본명이었다. 평소 털보 아저씨라고만 불렀기에 순간적으로 본명이 낯설게 느껴졌다. 성훈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 데이브님… 제가 말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죠?” 데이브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떨구더니, 다시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글쎄요, 그건 관리자들이랑 인사팀에서 회의를 해봐야 알죠. 가볍게는 해고 처리… 그 정도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성훈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맞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글쎄요, 사실 제가 사원님들 이름을 다 모르긴 합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데이브의 표정이 굳어졌다. 담배를 바닥에 내던진 그는 성훈의 어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성훈이 고통스러워하자 데이브는 귓가에 바짝 대고 낮게 말했다. “저, 이렇게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진심으로 혐오해요. 강수철 그 사람이 아니면… 박성훈 씨, 당신인가요?” 무서웠다. 목은 담배 연기로 타들어가고, 어깨는 쥐어짜이듯 아파왔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당장 그 손 떼지 못해?!" 그 순간 빈 깡통 하나가 날아와 데이브의 어깨를 스쳤다. 성훈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털보 아저씨와 몇 명의 사원들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처음 보는 다른 공정 직원이 휴대폰을 들어 촬영 중이었다. 데이브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표정을 다잡으며 성훈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성훈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털보 아저씨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눌렀다. “당신이 뭔데 우리 직원을 괴롭히는 거지?


데이브는 짧게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뭘 했습니까. 저는 그저 성훈 사원님을 불러, 이 사태를 누가 벌였는지 물어본 것뿐입니다.” 말끝에 묘한 여유가 묻어났지만, 공기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뜨겁게 달궈졌던 바깥의 열기가, 마치 냉방기를 틀어놓은 듯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시선을 털보 아저씨에게 고정했다. “강수철 사원님, 그만하시죠. 그리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깡통을 제게 던지셨나요? 하마터면 다칠 뻔했잖습니까.” 주위에서 참다 못한 사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도 만만치 않아!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 붙잡고 뭐하는 짓이야!” 데이브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짧게 경고했다. “조심하십시오. 저희도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차된 차량으로 걸어갔다. 문이 닫히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에서 또 다른 깡통이 날아와 차 옆면을 ‘탕’ 하고 울렸다.


순식간에 상황은 끝났다. 성훈은 온몸에 남아 있는 긴장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었고, 손끝까지 미세하게 떨렸다. 털보 아저씨가 다가와 성훈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낮게 말했다. “아저씨, 지금 위험해요. 조심하세요.

털보 아저씨는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저었다. “쟤들은 절대 우리를 쉽게 자르지 못해. 다 권력 남용이지.” 그의 말투에는 분노와 확신이 뒤섞여 있었고, 성훈은 그 순간, 이 싸움이 끝까지 갈 거라는 걸 직감했다.


깡통 사건이 있던 다음 날, 회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갔지만, 현장의 공기는 이미 변해 있었다. 관리자는 하루 종일 현장을 서성이며 사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 눈빛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고르는 눈빛 같았다. 성훈은 그 시선이 단순한 감시를 넘어선, 노골적인 범인 찾기의 기운임을 바로 느꼈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내 메신저에 공지가 떴다. “특정 사원의 불법 행위와 관련해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해당 사항을 알고 있는 분은 즉시 보고 바랍니다.” 평소 시끄럽던 식당은 그 문구가 울리는 순간, 마치 누가 리모컨으로 소리를 꺼버린 듯 조용해졌다. 누군가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유리처럼 울렸다.


그 후로 분위기는 더 숨길 수 없을 만큼 달아올랐다. 몇몇 사원들은 털보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시선을 피했고, 일부는 아예 다른 길로 돌아다녔다. 성훈은 그 반응이 단순한 거리 두기가 아니라, 처형장 앞에서 죄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습성 같았다. 회사는 불안을 먹고 자라는 괴물처럼, 조용히 사람들의 등을 굽게 만들고 있었다.


오후, 재고관리부에서 두 명이 불려갔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표정은 마치 몇 년은 늙은 사람 같았다. 그중 한 명이 성훈과 스쳤을 때 낮게 말했다. “조심해. 강수철 얘기 계속 나와.” 목소리에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의 체념이 서려 있었다. 성훈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창고에서 만난 털보 아저씨는 여전히 태연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종이를 잡은 채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불려가면, 남은 사람들한테 전해. 절대 멈추지 말라고.” 그 목소리는 농담처럼 들렸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그 말을 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저녁 무렵, 창고 앞에서 두 명의 관리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아침, 인사팀장이 직접 부른대.” “확실한 거야?” “거의.” 그 짧은 대화가 성훈의 귓속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쳤다. 그 순간, 바닥이 기름칠이라도 된 듯 미끄러워지고, 세상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퇴근 직전, 사내 메신저가 다시 울렸다. “내일 오전 9시, 강수철 사원은 인사팀 사무실로 출석 바랍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성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채팅창에는 이미 ‘드디어 나왔네’라는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고, 웃음 표시까지 달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모인 군중의 농담 같았다.


그날 밤, 성훈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낮에 들었던 말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떠다녔다. 절대 멈추지 마라. 그 말은 명령이자 유언이었다. 창문 밖에선 여름밤의 습기와 매미 울음이 뒤엉켜,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까지 불안이 차올랐다.


잠이 오지 않던 성훈은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 공기가 눅눅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바라봤다. 달빛도 바람도 없이, 어둠이 도로를 완전히 삼킨 채 매미 울음만이 축축한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곧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교과서에서만 읽던 ‘역사 깊은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성훈의 머릿속에는 나라의 해방보다 회사의 ‘숙청’이 먼저 떠올랐다. 어쩌면 내일은 회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 터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건이 끝나면, 털보 아저씨 다음은 자신일 거라는 생각이 서늘하게 자리 잡았다. 창밖 어둠 속, 가로등 불빛은 유난히도 희미했고, 그 불빛 아래에 서 있는 듯한 ‘다음 차례’의 그림자가 점점 성훈 쪽으로 다가오는 듯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복도는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서 있었고, 그 사이로 털보 아저씨가 걸어갔다. 걸음은 느렸지만 단단했고, 어깨는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성훈은 이상하게도 승리와 패배가 동시에 묻어 있는 그림자를 보았다.


인사팀 사무실 문 앞에 선 털보 아저씨가 잠시 멈춰 섰다. 뒤를 돌아 성훈을 바라봤다. 짧은 눈빛 속에는 ‘끝까지 해내라’라는 말과 ‘이제 네 차례’라는 선언이 섞여 있었다. 문이 열리며 차가운 냉기가 복도까지 스며나왔다.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묘하게 길게 울렸고, 성훈은 그 소리를 오래도록 들으며 서 있었다.


인사팀 사무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히자, 털보 아저씨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안에는 센터장을 비롯한 관리자들과 사무직 직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마치 면접장이거나, 피고인을 기다리는 재판정 같았다.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센터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 강수철 사원님. 우리 회사와 함께한 지도 벌써 5년이 되었군요. 그동안 불만이 많으셨죠. 오늘은 그 얘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인사 총관리자 데이브가 사원님의 동료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게다가 그 장면이 촬영돼 SNS에 올라갔더군요. 그래서 데이브는 당분간 출근을 못 하게 했습니다.


방 안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털보 아저씨는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른 관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 계시지 말고 앉으시죠. 편하게 말씀 나눕시다.” 그러나 털보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앉기 싫습니다. 저는 제 뜻을 말하러 온 겁니다. 최근 회사의 업무 강도는 도를 넘었습니다. 하루 10시간, 숨 쉴 틈 없이 굴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없었죠. 얼마 전에는 한 명이 혹서기에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한 건 병원에 데려다 준 것뿐 아닙니까?


센터장은 느릿하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건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희는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유급 휴가를 지급했어요. 산재 처리를 위해 절차도 밟았습니다. 더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요?” 털보 아저씨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돈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답게 대우받고 싶습니다. 혹서기에 쓰러진 그 사람이 운이 나빴으면… 죽었을 겁니다. 그날 실내 온도는 35도였습니다. 휴게실도, 에어컨도 없습니다. 얼음물로 버티지만, 30분이면 얼음이 다 녹아버립니다.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하라는 겁니까? 우리에게 충분한 휴식 시간을 준 적이 있습니까?


옆에 앉아 있던 공정 관리자가 팔짱을 끼고 말을 받았다. “그래서 중간에 20분씩 쉬게 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루에 맞춰야 하는 물량이 있습니다. 그게 밀리고 밀리면, 당연히 힘들어지는 겁니다. 저희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시죠.


털보 아저씨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입장이라… 입장은 서로 다른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차이가 목숨값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누군가의 볼펜 두드리는 소리만이 묘하게 크게 들렸다.


성훈은 인사팀 사무실 앞 낡은 의자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털보 아저씨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건 분명했다. 복도 끝의 형광등은 깜빡이며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성훈의 귀는 닫힌 문 너머의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때,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성훈이 고개를 들자 데이브가 서 있었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하자, 성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데이브는 짧게 안부를 묻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런 일은 언젠가 터질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도 '35일 감금' 같은 정책에 불만이 많죠. 게다가 우리는 사원님들보다 두 시간 먼저 출근하고, 네 시간 늦게 퇴근합니다. 하루 물량 못 채우면 그날 밤 다 끝내야 하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렇게 나쁜 사람입니까?


성훈은 반박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데이브의 말은 변명 같으면서도 묘하게 애원처럼 들렸지만, 결국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데 그쳤다. 그는 아무말도 없이 정면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 순간은 성훈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순간이었다. 심장은 미친듯이 요동을 치고 있었으며, 자리에 움직이지도 일어서지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마네킹처럼 앉아만 있었다.


센터장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 강수철 사원님은… 어떻게 하길 원합니까?” 사무실 안의 공기가 순간 더 무거워졌다. 털보 아저씨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가 원하는 건 세 가지입니다. 최저 시급보다 조금 높은 10,890원, 그 돈은 적습니다. 하지만 더 올려달라 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점심 외에 쉬는 시간 40분,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에어컨을 설치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다른 사원님들은 죄가 없습니다. 모든 건 저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벌은 제가 받겠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건 공감이 아니라 냉소였다. 웅성거림이 번졌지만, 그 소리는 놀람이 아니라 얕잡아보는 기색에 가까웠다. 센터장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건 당연한 얘기고요.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저희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부른 겁니다. 오늘 하루 사원님 때문에 못 친 물량은 누가 책임집니까? 참 이기적이시네요.”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한 장의 종이가 책상 위를 미끄러져 털보 아저씨 앞으로 다가왔다. 굵은 글씨, ‘해고통보서’.


관리자들의 의자가 일제히 밀려나며 마찰음을 냈다. 털보 아저씨는 작게 웃었다. “이게 무슨 회사입니까. 미친 곳이지. 인권도 없고, 오직 자기 배만 채우는 곳이지.” 그는 볼펜을 쥔 손을 굳게 움켜쥐고, 해고통보서에 단번에 서명했다. 종이는 짧게 허공을 가르다 센터장 앞에 떨어졌다. 그 순간, 한 관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들이 일을 빨리, 제대로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안 왔어! 매번 실수투성이고, 물량도 못 맞추면서 무슨 큰소리야? 단 한 번이라도 전량 맞춘 적 있어?!” 말이 벽에 부딪히듯 튕겨 나왔다. 털보 아저씨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우릴 바보로 아십니까? 우리도 사람입니다. 평소에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해 보시오. 그리고 당신들끼리 낸 그 소문들, 그걸로 회사에서 몇 명이나 나갔는지 아십니까? 다 말해줘야 아시겠습니까?


센터장은 손을 내저으며 마무리했다. “그만하시죠. 어차피 본사에서 내려올 겁니다. 당신 요구는 다 이뤄질 겁니다. 다만 당신은 이곳에서 더는 일할 수 없습니다. 에어컨, 휴게 시간, 다 바뀔 겁니다. 그러니 좋게 나가시죠. 남은 인원은 오늘 물량 내일까지 처리하고, 35일 감금 규정은 없애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렸고, 센터장과 관리자들이 나갔다. 복도 끝에서 센터장은 데이브를 불렀다. 데이브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남겨진 성훈의 시야 속에서, 털보 아저씨가 인사팀 사무실 문을 나섰다. 담담한 표정, 그러나 어딘가 허전한 뒷모습이었다. 성훈이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되셨어요?”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그의 뺨 위에서 빛을 머금은 눈물 한 줄이 천천히 떨어졌다. 사무실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창밖의 매미 울음만이 여름 한가운데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성훈은 털보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되었다. 연락처는 모두 차단됐고, 그는 회사 공지 메신저에 단 한 줄만을 남겼다. 굵고 짧은 글씨, “오늘부로 나는 해방이다.” 그 문장이 사무실 모니터 위로 번쩍 스쳐 지나간 뒤, 몇 분 후 회사의 공식 공지가 올라왔다. [항상 저희 물류창고에서 일을 해주신 모든 사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계속해서 높아지는 물량을 맞추기 위해 7월 20일부터 8월 25일까지 휴가를 금지했으나, 본사와의 회의를 통해 해당 규정을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혹서기를 대비해 사원님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더운 날씨로 더 많은 분들이 힘들지 않도록 센터 내 휴게실 공사를 통해 에어컨과 선풍기 설치를 강화하고, 점심시간 외 휴게시간을 부여할 것을 알립니다.]


며칠 뒤, 사람들은 속삭였다. 누군가는 그를 문제아라 했고, 누군가는 그를 불씨를 지핀 자라 불렀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이 그를 ‘영웅’이라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억눌린 공기가 가득하던 회사는 조금씩 달라졌다. 관리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묻어 있었지만, 더는 사원들에게 고함을 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어색할 만큼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묘한 안도감이 번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곳곳에 에어컨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휴게실 공사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회사는 그렇게 변했다. 단 한 사람의 용기가 그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라 불리던 그가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놓고 떠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광복절’의 ‘휴가철 특사’가 깊게 각인되었다. 시끄럽고 답답했던 현장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만든 바람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세바스찬입니다. 2025년 8월 15일, 올해는 ‘광복절’ 8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역사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이 남아 있는 날이라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지금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희생과 용기에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광복절의 의미를 떠올리며, 마치 현재의 강압적이고 부조리한 회사 속에서 싸우는 한 영웅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이야기는 제가 처음에 구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상황을 상상하며, 제가 과거에 다녔던 직장을 떠올리고, 오롯이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 글을 모든 직장인, 그리고 더 힘든 환경에서 묵묵히 현장을 지키고 계신 분들께 바칩니다. 부디 이 글이 작은 위로와 응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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