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뜨거웠던 3일 이었다...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 있었다. 형광색 한복을 입은 누군가의 실루엣. 그 아래에는 익숙한 문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다음 달 17일, 드디어 결혼합니다 :)" 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혼잣말했다. “그래... 너도 가는구나.”
사촌동생이다. 애초에 연락을 안 한 지도 오래됐지만, 수많은 사촌들 중 내가 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촌이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직접 연락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는 알림으로 결혼 소식을 알게 되다니. 뭔가 기분이 씁쓸하고, 조금은 이상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순간 문득 ‘기회’라는 생각이 스쳤다.
집을 나와 살아온 지 20년. 부모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작정 결혼식장으로 향할 수는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창밖에 천둥이 울리고, 억수같은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 안은 더 습하고, 더 끈적하고, 더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득 떠오른 기억은 반대였다. 이렇게 눅눅한 여름날이 아니라, 햇살이 미친 듯이 내리쬐던 날. 아스팔트조차 녹아내릴 것 같던 날씨. 내 머리카락도 그날의 태양에 볶이듯 구워져, 자연스럽게 곱슬거렸을지도 모른다.
2010년, 그 여름. 서울 외곽, 오래된 주택가와 반쯤 무너진 창고 사이 골목을 나는 땀에 젖은 셔츠를 붙잡고 걷고 있었다. 강남으로 가는 버스는 여느 때처럼 만석이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줄도 없이 새치기해 먼저 올라탔다. 나는 애초에 탈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역까지는 대략 25분 거리. 햇볕은 피부를 찌를 듯이 내리쬐었고, 갈증은 목을 조이듯 몰려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땀이 목덜미부터 허리까지 줄줄 흘렀다. 그때였다. 낡은 담벼락 사이, 작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수제 아이스커피 800원 – 오늘 오픈”
손바닥만 한 간판이 너무 작아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내려다본 지갑에는 몇 장 남은 지폐가 들어 있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여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고요했고, 시원했고, 무엇보다 커피 향이 깊었다.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진한 인공향이 아닌, 무언가 더 구수하고, 부드럽고, 오래된 냄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빼고 둘러봤지만 사장도,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잠시 멈춰버린 시간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안쪽 커튼이 살짝 젖혀지더니, 누군가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흰 셔츠에 청바지, 짧은 머리.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딘가 눈에 확 들어오는 얼굴. 그녀는 나를 보며 웃었다.
“어서 오세요.”
나는 그 말에 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동네 골목 끝에, 이런 사람이, 이런 카페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황해서 괜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넣고는 말했다. “아이스커피 한 잔이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음 가득한 유리잔에 핸드드립 커피를 천천히 부어 내왔다. 프림도 설탕도 없이, 그저 진한 커피의 맛만 남은 음료였지만, 이상하게 기운이 돌았다.
나는 거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잔을 다 비우고는 조용히 나왔다. 하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나는 계속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작고 조용한 골목 안, 커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 사람. 흔한 미소였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 미소였다. 나는 결심했다. 내일은, 꼭 다시 가봐야겠다고. 그리고 오늘보다 한 마디쯤은 더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그해 여름, 내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버스 시간에 맞출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그냥 집을 나섰다. 이어폰을 꽂고 MP3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미친 듯이 더웠다. 땀은 눈으로, 이마로, 목으로 줄줄 흘러내렸고, 두 눈과 뇌가 동시에 폭발할 것만 같았다. 괜히 버스를 타지 않은 내 자신이 한없이 밉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제 그 카페,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그녀를 생각하자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 웃음 하나만으로도, 오늘 하루쯤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착한 카페는 어제와 똑같이 한산했고, 내부에는 조용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빼고 문을 열었다. 딸깍.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어제와 똑같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다시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순간 멈췄고, 딱 3초쯤 뒤에야 겨우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어색한 공기가 잠시 흐르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료…는…?”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이스커피요!” 마치 시험 문제 정답이라도 외운 것처럼 다급한 말투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사라졌고, 나는 어느새 익숙해진 테이블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커피를 내주고는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 뒤에는 뭐가 있는지, 왜 굳이 그 안에서 머무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카페에 흐르는 재즈 음악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에어컨의 일정한 바람 소리,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미세한 소리, 그리고 내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는 지하철을 놓칠 것 같았다. 지각이라도 하면 상사의 잔소리는 뻔했다. 나는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 그녀가 다시 커튼을 걷고 나왔다. 나는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 커피도 정말 맛있네요. 내일 다시 올게요!” 그리고는 눈을 제대로 마주칠 용기도 없이, 후다닥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밖은 여전히 덥고 눈부셨지만, 이상하게도 내 안에는 조용한 시원함이 퍼져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의 얼굴만 계속 아른거렸다. 일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심지어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진짜 예뻤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얼굴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내 이상형이었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더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거울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기도 했다. “좋아, 내일은 좀 더 일찍 일어나서 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알람을 맞춰두었다. 무언가 잘 꾸며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정한 셔츠라도 입어야 할까? 향수를 뿌릴까? 그녀가 내 존재를 조금 더 기억해주길 바랐다.
그날 밤, 오랜만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나는 천천히 집을 나섰다. 기온은 어제보다 더웠지만, 마음은 조금 들떠 있었다.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날 때, 그곳에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그냥 지나쳤다. 굳이 타지 않아도 되는 버스였다. 조금 더 걸어가니 길모퉁이에 꽃집이 하나 보였다. 순간 문득, 그녀에게 꽃 한 송이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해바라기 한 송이를 골랐다. 기분이 괜히 좋았다. 햇살도, 땀도, 그날의 공기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녀의 카페에 도착했다. 역시나 한산했고, 어제처럼 조용한 재즈 음악이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나는 해바라기를 손에 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튼을 젖히며 나온 그녀의 품에는 아이가 안겨 있었다. 눈을 마주친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됐는데…” 나는 말이 막혀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고 조용한 그녀의 품속에 잠든 아이.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 손에 들고 있던 해바라기 한 송이는 순간적으로 무겁게 느껴졌고, 나는 그것을 조용히 가방 안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그럼 이만…” 그 순간,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더우셨을 텐데, 커피 한 잔 하고 가세요. 돈은 안 받을게요. 저희 단골 손님이시잖아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웃을 수 있었다.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익숙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조용한 카페 안, 에어컨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마치 내 기분을 비웃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그녀는 피곤한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희 애기가 어제 잠을 못 자서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얼음이 녹아 점점 밍밍해지는 커피를 조금씩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해바라기 한 송이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날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침에 눈이 떠졌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카페에 가지 않고,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하루를 반복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계절이 지나고, 어느 날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한 번쯤 다시 가보고 싶었다. 나는 조용히 그 골목을 찾았다.
예전의 조용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사람이 많았고, 거리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커피를 만들고, 주문을 받고, 손님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평범하고, 또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때 테이블 위에 조용히 놓여 있던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시들어버려 바스라질 듯 말라 있었고, 나는 그것을 손에 쥐고 밖으로 던졌다.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이. 그렇게 나는 그녀를 잊었다. 그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첫사랑이었다.
"참 뜨거웠던 3일 이었다..."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나는 추억을 더듬듯 회상에 잠겼다. 어느새 시간이 저녁으로 기울어 있었다. 무심코 노트북을 켜고 OTT 사이트를 찾아, 한 편의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을 믿는 남자와,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가 500일 동안 겪는 연애와 이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 영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어쩐지 나와 비슷하다는 느낌. 혼자 애쓰고, 혼자 기대하고, 결국 혼자 멈춰버린 감정의 궤도.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지만, 영화 속 여주인공은 사랑을 믿지 않는 캐릭터라니. 뭔가 더 아이러니하고, 웃프게 느껴졌다.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간 뒤, 창밖을 보니 빗소리가 멈춰 있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동해 옷을 챙겨 입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혹시 아직도 그 카페가 있을까. 혹시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고, 나는 오래전 그 골목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거기는 이미 골목이 아니었다. 낡은 건물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 카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처럼, 전부 지워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우연히, 예전 그대로인 꽃집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해바라기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나는 해바라기 한 송이를 샀다. 집에 돌아와 물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해바라기를 조심스럽게 꽂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쓸쓸한 방 안. 나는 그저 해바라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한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하루를 천천히 마무리했다.
원고에 사용된 그림은 AI로 제작된 그림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