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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쌤 Aug 08. 2022

인싸와 아싸 어떻게 살 텐가?(feat. 이황, 조식)

인종실록~선조실록

2022년 5월 17일 대략 10개월 만에 블로그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7번 넘어지면서 와신상담하며 갈고닦았고, 1일 1포 이상 규칙을 지켜가며 수행한 결과인지라 합격의 기쁨이 더욱 컸던 날이었다.


'인플루언서란?'

SNS에서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많은 팔로워(follwer: 구독자)를 통해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를 끌어다 내가 얻은 부캐에 붙이려니 아직은 한없이 작고 초라하기만 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인플루언서가 되려고 했는가?'

'나는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꿈꾸고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런 생각을 할 즈음  조선왕조실록 스터디 <역사라면>에서 인종실록 부터 선조실록을 읽고 있었다.




<중종실록>  때부터 이미 고구마였지만 <인종실록>, <명종실록>은 핵 고구마 맛이었다. 


<선조실록>은 고구마 맛을 느끼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터졌기 때문에 조금 다른 맛이기는 했지만 뭐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해법이 필요한 시대였건만 명분으로 포장된 어불성설만 오고 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가능성 많던 인종은 8개월 만에 식음을 전폐하다 세상을 떠났고,  명종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아래서 눈물을 흘리다가 수많은 숙제만 남기고 죽었다.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하여 백성들은 굶주리거나 도적이 되었다. 을묘왜변이 일어나 '임진왜란'의 수차례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음에도 사회는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1592년에 일어난 7년의 전쟁은 조선이라는 사회를 나락까지 끌고 갔으며, 겨우 지켜냈을 뿐이다.




이러한 핵 고구마 시대에도 인재는 있었다.


영남학파의 양대산맥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은 각자의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고 이끌어 가고 있었다. 박시백 선생님의 표현으로 '양지에서 음지를 지향하는' 이황 선생은 요즘 말로 인싸력을 발휘하셨고, 퇴사 후에도 제자를 키워가셨다. 반면 조식 선생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처럼 '성성자'라는 방울과 칼을 차고 다니시며 아웃사이더 즉, '아싸적' 행보를 이어가갔다. 또한, 백성들의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만의 신념과 방식으로 제자를 키워갔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블로그를 시작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며 달리다 보면 즐겁고, 그 즐거움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전염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향력은 극히 일부였고, 지지부진한 속도와 인플루언서 연속 탈락이라는 현실에 레지스탕스처럼 체제가 이상하다고 불만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조식 선생처럼 '티끌이 오장에 생기면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는 마음까지는 아니었지만 많이 답답했고, 손절 직전까지 갔었다.


갑자기 그 시절을 생각하니 급 부끄러워진다.

'조식 선생처럼'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도 한없이 모자란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인플루언서'라는 부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면 적어도 음지에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내 생각이, 내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할 때이니까 말이다.


'양지에서 음지를 지향하든', '양지에서 더 따뜻한 양지를 만들어 가든' 적어도 이황 선생님처럼 생각과 힘을 키워야 한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갔던 제자 강항을 통해 일본 주자학의 발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는 '세상을 변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작고 큰 선한 영향력을 일으켜서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바로 인플루언서의 숨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조식 선생의 제자인 곽재우 등 아주 많은 의병장을 배출해내어, 조선을 지키는 데 아주 큰 힘이 되기도 하였고, 광해군 시절 북인 정권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 꿈이 좌절되지 않았던가!




인생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양지에 머물면서 인싸로 살아야 내 생각의 일부가 전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싸와 아싸 사이에서 늘 고민하며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방식을 비난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지만 결국에는 인싸의 세상이 양지인 경우가 많다.


나는 그만 이황 선생님처럼 살아가고 싶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좋은 인플루언서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의 아들들 역시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외롭지 않도록...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사는 보람이 느껴지도록 말이다.


그러려면 잠시 굽힐 줄도 알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내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세상이 늘 태평성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인종, 명종 그리고 선조 때 세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싸든 아싸든 자신만의 꿈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멋진 일이기에 가슴 쫙 펴고 살아가자! 기죽지 말고 일단은 열심히 살아보자!


인생에는 해답이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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