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탈피 후유증
크레스티드 게코는 위로 올라가는 걸 좋아한다.
레미도 높은 곳을 좋아한다.
새집을 마련할 때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세로로 긴 집을 택했다.
(나중에 얘 집 마련 2, 3탄으로 보여줄 예정)
공중에 매달아 놓은 구조물에도 곧잘 올라가고,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돌 위에나 낮은 구조물 위에만 있었다.
하루는 바닥 한구석에서 레미가 자는 모습을 발견했다.
가지런히 뒷발을 모으고, 앞발은 수영하듯이 뻗은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 죽은 거 아니야?
상상도 못한 답장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다, 움직이는 거 봤다고 보내놓고도 왠지 모르게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도 레미는 잠을 자고 있었다. 깨고 나서는 또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다 군데군데 몸에 남은 탈피 자국이 보였다. 지난번 탈피는 실패였다. 날이 너무 건조했고, 분무가 충분치 않았는지 하얀 껍질을 덕지덕지 달고 다녔다. 몇 번을 떼어주려다 어련히 다음번에 또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높은 곳을 잘 올라가지 않았고, 벽을 잘 짚지도 못했었다. 헛발질하듯이 벽에서 미끄러지는 게 귀엽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줄도 몰랐다.
AI에게 물었다.
혹시 탈피를 잘 못하면, 발바닥에도 흔적이 남을 수도 있어?
흔적이 남아서 잘 미끄러지기도 해?
그럼 미끄러진 게 트라우마가 되면 다시는 높은 곳을 안가기도 해?
다음번 탈피가 언젠지 모르니까, 그 전에 도와줄 방법은 없어?
쉼 없이 쏟아낸 질문에 귀찮은 기색도 없이 AI는 친절하게 답변했다.
요지는 이러했다.
탈피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 흔적이 발바닥에도 남아있을 수 있다. 그 때문에 미끄러질 수도 있다. 그리고 벽면에 너무 분무를 많이 하면, 그 물방울 때문에 미끄러질 수도 있다.
미끄러지지만 않는다면, 레미는 트라우마 없이 곧잘 높은 곳을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작은 사우나를 만들어주면, 탈피를 도울 수 있다.
는 말에 나는 곧바로 레미를 위한 작은 사우나를 만들었다.
작은 통에 따뜻한 물을 흠뻑 적신 키친 타올을 두껍게 깔았다. 그리고 레미를 넣고, 15분 간을 기다렸다.
통에 들어간 레미는 답답한지 계속 버둥거렸다.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데, 자꾸만 미끄러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얼마 되지 않아, 벽에 붙인 발바닥에서 다 벗기지 못한 하얀 허물 조각이 보였다.
쓱쓱 문질러서 떼어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면봉을 가져다 대면 또 도망가겠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이럴 땐 불편하다.
아니다, 말이 통해도 숱한 오해에 둘러싸여 살기도 한다.
그러니 내가 좀 더 바라보고, 알아차리고, 도와준다면- 말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사우나를 마친 뒤, 예전에 쓰던 집으로 보내줬다.
좁은 공간에 부드러운 구조물은 다 빼고, 거칠고 모난 구조물만 가득 넣었다. 몸에서 불려진 남은 허물이 구조물에 비벼져서 자연스레 벗겨지기를 바라면서.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레미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레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문이 제대로 안 닫혀서 밖으로 나간 걸까?
돌멩이와 나무조각을 다 빼서 찾아봐야하나 하는 순간,
바닥에 깔린 키친타올 사이에 뻗어 잠이 든 레미를 발견했다.
안도에 한숨과 함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의 취향에 소리 내 웃어버렸다.
일부러 거친 면만 남겨뒀더니, 용케 또 보드라운 키친타올에서 기어코 자신의 잠자리를 찾아내는 레미.
부디 다음번 탈피는 깨끗하고 맑게 성공하기를...!
D+130
이름 : 레미
분류 : 파충류, 도마뱀
종 : 크레스티드 게코
모프 : 레드릴리
탄생일 : 25년 08월 13일
첫만남 : 25년 09월 07일
성별 : 모름
무게 : 아직 측정 불가
한 줄 메모 : 내 작은 도마뱀이 어서 빨리 컸으면 좋겠다가도, 그냥 언제까지고 작은 모습으로 계속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