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잠 재운 초고

연필 없이 초고 읽기

by 리을

어찌 되었든 초고를 완성했다.


빨리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보고 싶었다.

달라진 설정, 널뛰는 개연성, 빈약한 전개를 덮어두고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전체 인쇄를 눌렀다.

출력된 엉망진창의 초고를 가방에 넣어두고 재웠다.

날 것의 고기에 무슨 양념이라도 베길 바라는 마음처럼 내버려뒀다.


그리고 삼 일째 되는 오늘, 키보드는 멀리 치워두고 출력한 종이만 책상 위에 올렸다.

자꾸만 연필을 붙잡고 싶어 하는 오른손을 모르는 척하며 빈손으로 읽었다.

제멋대로 고치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고 읽는 일에 집중하려 했다.


초고는 턱없이 부족했다.

인물의 설정도 마음대로 바뀌었고, 중요한 악역의 비중이 너무 없다.

두 덩어리로 분리된 것처럼 앞부분과 뒷부분이 어색하다. 절정으로 가는 개연성이 없다.

숨기고 싶은 솜씨가 여실히 드러나는 기분, 입술이 간질간질하다.


그럼에도 연습장에 휘갈겨 적던 낙서가 소설인 척하고 있었다.

그래, 망상 김 작가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초고가 또 있을까.

조금 더 소설인 척 둔갑 시켜보자.


오늘은 좀 쉬고 내일부터...ㅋㅋㅋ






접속 일자 : 26년 3월 23일 월요일

분량 : 0자

상태 : 연필 없이 초고를 읽느라 지쳤다. 도마뱀이나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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