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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un 09. 2023

하루라는 마법

잠들기 전 늘 꿈꾸는 아침이 있다. 알람이 울리기 조금 전에 눈을 번쩍 뜨고, 옆 사람을 깨우지 않고 살그머니 침실을 나온다. 커다란 창문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어젯밤 놓아둔 노트를 펼친다. 비몽사몽인 기운에 펜을 잡고 떠오르는 무엇이든 써 내려간다. 기분, 날씨, 오늘 하루의 계획, 지난밤의 꿈, 며칠 내내 나를 괴롭히던 사람 그리고 쓰고 있는 소설의 이야기까지 내용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대략 삼십여 분을 써 내려가다 보면 목표했던 세 페이지 가득 글자로 채워진다.


미련 없이 노트를 덮고, 기지개를 켤 때쯤 침실에서 소리가 들린다.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을 따뜻한 말로 배웅하고, 나는 수영을 하러 갈 준비를 한다. 수영을 마치고 시원한 기분으로 건강한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기분을 조심스레 살핀다. 책상에 앉을 수 있다면 집에서, 침대가 자꾸만 끌어당긴다면 집을 벗어난다.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고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운 좋게도 좋아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더듬더듬 소설을 써 내려갈 수 있다면-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침이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는 아침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알람에 쫓기듯 눈을 뜨는 날이 훨씬 더 많고, 비몽사몽인 기운에 펜보다 폰을 잡는다. 밤새 쌓인 정보를 훑다 보면 삼십여 분은 우습게 흐른다.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둔 수영복 가방을 보면 설렘보다 갈등이 일렁인다. 다녀오면 개운하고 기분이 좋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눈앞의 포근함이 더 가깝다. 알량한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분명히 책상 위에 앉아있었는데 어느새 침대에 들어가 있다. 도서관 좋은 자리라 기분이 좋았는데, 준비해 간 도시락을 열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더울지 추울지 비가 올지 눈이 내릴지 아니면 때아닌 태풍이 올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예보도 없는 기분에 하루 종일 우산을 들었다 놓고, 옷을 껴입다 다시 벗었다. 결국 온몸이 비와 땀이 뒤섞인 채 주저앉고 만다.


창밖의 어두운 하늘색을 보면 현실로 돌아온다. 그릇이 한가득 쌓여있는 싱크대, 빨래를 한가득 담고 있는 건조기,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바닥 그리고 뭣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는 나…. 마음을 달랠 틈도 없이 어느새 해야만 하는 일들에 휩싸이고 만다. 닥치는 대로 집안일을 해나가다 보면, 이상하게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마음이 든다. 아까운 일에 시간을 쓰는 것 같아 속이 타들어 가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낭비했으면서라는 자조적인 실소가 터진다. 그렇게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에 백기를 든 날, 완패-한 날은 수도 없이 많다. 패배감 가득한 하루의 끝자락, 불 꺼진 침대에 누우면 유독 정신이 말똥해진다.


-내일 하루는 어떻게 보낼 거야?


누군가 묻는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목소리. 부드러운 말투로 걱정하는 듯 보이지만, 나는 그 속내를 알고 있다. 엉망진창인 오늘을 꼬집고 다가올 내일마저 어둡게 만드는 말이라는 것을. 옴짝달싹하는 입술과 다르게 아무런 말도 쉽사리 내뱉지 못한다.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시간만이 흐른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 순간을 외면하면 안 된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어물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외면할수록, 시선을 돌릴수록 더 크게 돌아오게 되니까.


아침이 될 때까지 지속될 것 같은 긴장감도 결국엔 깨어진다. 어떤 날은 깊게 잠든 남편의 고단한 숨소리에, 또 어떤 날은 문득 떠오른 문장 하나에, 또 어떤 날은 하고 싶었던 사소한 일 때문에


'잘! 잘 보낼 거야. 내일 하루는 잘 보내고 말 거야.'


수없이 완패하고도 당당하게 내뱉는다. 하루를 망쳤지만, 내일은 다르게 보내겠다고 다짐한다. 새벽 시간에 알람을 다시 확인하고, 내일을 위해 얼른 잠들어야 한다고 뻔뻔하게 말한다. 여기엔 명확한 근거도 확신도 없다. 어찌 보면 허세에 불과한 몸짓이지만, 우습게도 내가 꿈꾸는 아침에 다가서려면 그 몸짓이 꼭 필요하다.


이상적인 하루를 보내도 하루로 끝이 난다.

절망적인 하루도 결국 하루로 끝난다.


내게 하루라는 마법은 잠들기 전,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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