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간의 갈등은 하느님도 풀지 못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희생과 사랑으로 키운 아들에 대한 기대와 오직 사랑 하나 믿고 평생을 함께 하고자 했던 생각의 차이다. 그만큼 한 남자를 두고 서로 입장과 기대치의 갭이 크다는 말인 것 같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50대 초반에 혼자가 된 여인에게 맏아들은 특별한 존재다.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기보다는 모든 것은 맏아들과 의논해야만 했다. 어쩌면 남편처럼 의지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은 월급 타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과 그리고 먹을 것이나 옷을 사 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대견하고 든든한 버팀목처럼 생각했다. 그런 아들이 결혼을 했다. 고된 시집살이로 마음고생을 많이 한 어머니는 살갑고 좋은 시어머니가 되리라 결심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며느리는 말이 없는 편이라 도대체 그 속을 알 수 없는 어려운 존재였다. 최대한 부딪치는 일없이 갈등만 생기지 않게 하자. 살다 보면 섭섭한 일도 생기게 마련이다. 맘고생은 혼자로 족하지 며느리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해하며 오손 도손 살고 싶다는 속 마음을 한 번도 며느리에게 말해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마음에 안 들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냥 혼자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딱히 꼬집어 불평이나 말대답을 한 적도 없는 며느리의 잘못을 지적할 것도 없었다. 찬 바람이 쌩 부는 것 외에는 버릴 것 없는, 딸들이 본받을 것이 많은 여자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눈에 거슬리거나 하고 싶은 말도 그냥 꾹꾹 눌러 두었다.
그런데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도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결혼 전과 달라진 것 같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내만 아는 아들이 섭섭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희한하게도 이해하려고 하거나 감정을 누를수록 관계 개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골이 생기기 시작하며 섭섭한 마음이 미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녀가 하나, 둘인 요즘에는 특정 지어 말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적당히 살이 올라서 튼튼해 보이고 덕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우리는 맏며느리 감이라고 했다. 맏아들에게 시집온 여인은 흔히들 생각하는 맏며느리감과 거리가 멀었다. 짙은 까만 머리로 예쁘장하고 홀쭉하게 마른 여인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집안을 이끌기보다는 보호해 주어야 할 만큼 약해 보였다. 모두 기피하는 줄줄이 사탕 같은 동생들이 있는 집으로 시집을 와 준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고마운 일이다. 동생들은 사실, 자신들 때문에 맏아들이 결혼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미안함이 막연히 있었다. 어쩠던 새로운 분위기를 상상하며 가족이 생긴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새침한 성격으로 왁작거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녹록하게 보이면 동생들에게 휘둘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생들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새 가족이 은근히 섭섭했다.
동생들은 나이를 먹어서야, 원래 말 수가 없는 새침한 성격인데 형제 많은 집 맏며느리로 ‘참 힘들었겠다’라고 이해했다. 맏며느리도 수 십 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겨우 자신은 가식이 없고 한결같다는 마음을 동생들에게 전했다.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이 고부의 연을 애증의 세월로 삼십 년 넘게 유지했다. 두 여인은 어느 한 사람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세월은 전할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며느리는 슬피 울었다. 그리고 비슷한 모습으로 15년 후 며느리도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모두 끝까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떠났다. 서로 인내하며 참았다고 했다. 골은 깊었지만 겉보기에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미움보다 더 나쁘다는 무관심이었는지 긴 세월을 신기하게 조용히 함께 살았다. 참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모든 관계개선은 대화만이 가능하다. 솔직한 대화를 했으면 어땠을까. 보기 좋지 않게 큰 소리가 났을지 몰라도 마지막 가는 길에는 모두 털고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싸움 끝에 정이 붙는다"라는 옛말이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