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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정원 Apr 19. 2023

키 크는 비 오시던 날

 비 내리는 날은 구질구질하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꽉 찼던 머릿속에 공간이 생기며 삭막했던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서 좋다. 뺨을 간지럽히는 보슬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라버린 가슴까지 촉촉하게 적셔준다. 비에 젖은 감성은 뾰족하게 얼굴을 내밀며 새싹이 돋고, 먼지 쌓인 창문과 거리는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에 깨끗해진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럽히는 근심과 잡념까지 쓸어가 버린다.




 아침부터 무덥고 습한 날씨에 몸은 무겁고 끈적이는 것이 머리가 띵하다. 이런 날은 움직여 주어야 지치지 않는다. 오랜만에 운동하고 돌아와 부산스럽게 청소를 하고 방마다 돌아가며 제습기를 틀어 놓았다.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더니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에 보슬비까지 따라온다.

 비 내리는 날에는 왠지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서둘러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책 한 권을 가지고 카페로 향했다. 책은 펼쳐만 놓고 커피를 마시며 멍하게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 구경만 한다. 통창에 부딪혀 또르르 내려오는 물방울 사이로 차들이 지나간다.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앉아서,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학교 가는 길목에 사촌 작은아버지께서 하시는 약국이 있었다. 무뚝뚝한 우리 가족과는 달리 사촌 작은아버지는 친절하셨고 상대방 마음을 잘 이해해 주셨다.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분”으로 말씀을 부드럽고 설득력 있게 잘하시는 분이셨다. 약국 앞을 지나가다 손님이 없으면 가끔 들러서 주시는 음료수를 마시며 놀다 오고는 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작은아버지께서 진지한 말투로 "나무는 비를 맞아야 키가 큰단다"라고 하시면서 키가 크려면 사람도 비를 맞아야 한다고 하셨다. 덧붙여 오빠들도 비를 맞고 키가 컸다며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놀리려고 그러시는 줄 알면서도 키가 큰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긴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있으면서 비를 맞고 집에 가면 궂은 날씨에 빨래도 안 마르는데 옷을 적신다고 엄마한테 혼날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마침 우산도 없었다. 기분도 꾸질꾸질해서 집에 가기도 싫었는데 흠뻑 비나 맞고 나도 키나 커 보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산을 같이 받고 가자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머리는 감은 것처럼 물이 줄줄 흐르고 빗물은 속옷까지 스며들어 적시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크라는 키는 안 크고 감기에 걸려서 며칠을 기침하며 고생을 했다.


  몇십 년이 흘렀어도 잊히지 않고 비가 오는 날이면 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신기하다. 친절하게 대해 주시던 사촌 작은아버지가 생각이 나서인지, 나무처럼 물을 먹고 크고 싶었는데 키가 크지 않은 아쉬움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길에는 여러 가지 꿈을 담은 우산들이 알록달록하게 물을 들이며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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