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흔적이 머문 자리
유난히 파랗고, 맑은 하늘이다. 어제저녁만 해도 비 예보가 있었는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아주 오랜만에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심란한 내 마음과 상관없이 화창한 날씨에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려본다. 올해 91세가 된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지금 서울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이곳에 들어간 지도 벌써 3년째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지내면서 세월을 더 빠르게 맞이하시는 듯하다. 이전보다 치매 증세가 더 심해져 때론 당신의 아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또 치아가 하나둘 빠지고 있어 식사도 밥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유동식만 먹는다. 게다가 이제 혼자 거동할 수 없어 누군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야만 이동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가 서울에서 제일 좋은 요양원이라더니, 그게 정말일까? 병원 마케팅에 속았나 보다. 너무 분한 마음이 차오른다. 여기에 가면 할머니가 조금 더 건강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할머니는 점점 더 작고, 아픈 아이가 되어갔다.
요양원 강당에 마련된 면회 공간에 들어서자 한 테이블 앞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조그마한 등이 보인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짧은 상고머리로 다듬고, 얼굴보다 훨씬 큰 마스크를 쓴 채 아무것도 없는 정면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할머니다.
“할머니, 나 누구게? 나 알아보겠어요?”
운전할 때 낀 안경을 쓰고 그대로 면회 장에 들어선 터라, 할머니가 안경 쓴 나를 생소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아차 싶어 얼른 안경을 벗자, 할머니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내가 너를 몰라? OO이 왔어?”
아주 오랜만에 들어본, 내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내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기억이 하나둘 되살아났나 보다. 할머니는 나의 두 손을 꽉 잡고, 조금 더 힘 있는 어조로 내 곁에 선 내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반겨주었다. 할머니 얼굴보다 큰 사이즈의 마스크는 점점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보이는 할머니의 미소가 정말 반가웠다. 살이 많이 빠졌지만 내 기억 속에 익숙한 할머니의 미소 그대로였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대화를 이어갔다. 유독 가늘었던 할머니의 팔은 이전보다 더 가늘어져 뼈와 혈관이 도드라졌다. 그래도 할머니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내겐 안도감으로 느껴졌다. 어느새 할머니의 눈은 내 아이를 담는데 열중했다. 오랜만에 만난 증손주가 반가워서일까, 당신 기억 속의 증손주가 부쩍 자랐기 때문일까. 할머니는 내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이의 안부만 계속 물었다. 키가 얼마나 큰 편인지, 아이가 아빠를 얼마나 닮았는지, 아이가 학교는 잘 다니는지 질문이 끝나질 않는다. 어쩐지 손녀인 나보다 증손주를 더 반가워하는 느낌이다. ‘할머니가 우리를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더 자주 찾아뵐걸.’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쌓여간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를 마주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언제나 불편하고, 피하고만 싶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에게서 받아온 상처가 이미 곪을 만큼 곪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결혼해서 독립하기 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그리고 오빠까지 우리 6명이 한 지붕 아래서 쭉 함께 살았다. 나는 그저 태어나보니 대가족의 막내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하나뿐인 손녀였다. 하지만 나는 이 집안의 유일한 손녀라기엔 그만한 사랑은 받지 못하며 자라왔다고 늘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아마도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와 무뚝뚝한 할머니, 할아버지 성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나의 엄마는 장남인 우리 아빠에게 시집을 온 그날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맏며느리가 됐다. 엄마는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시기 전까지 자그마치 35년을 한 집에서 모셨다. 명절뿐 아니라 거의 한 달 걸러 각종 제사들을 지내는 아주 유교적인 집안의 맏며느리로 살게 된 엄마의 삶은 어린 내가 봐도 너무 척박했다. 이런 집안에서 엄마는 ‘내 집’이라는 느낌 하나 없이, 한시도 편안하게 쉰 적이 없었을 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르는 “애미야” 한 마디에 엄마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느새 할머니 방 앞에 몸을 기울인다. 쪼르르 달려간 엄마에겐 싱거운 잔심부름이 뒤따른다. 또 충청도 출신 며느리가 제주도 출신 시부모의 입맛을 단번에 맞출 리 있을까. 엄마는 집안 대대로 자타공인 ‘장금이’ 손맛을 자랑하는, ‘요리 금손’ 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맛있네” 한마디를 안 한다. 식사 메뉴 전체가 입맛에 안 맞을 리 없는데도 시시콜콜 “이건 짜다, 질기다, 누구 먹으라고 이렇게 크게 했냐.” 밥상머리 위에 비난의 화살만 날아든다. 엄마의 등이 굽혀질 때마다 엄마의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지는 걸 생생히 목격하는 날들이었다. 참으로 고약스러운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
한편 우리 집안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내 오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장손을 끔찍이 아꼈다. 오빠가 엄마 속을 썩이던 때에도 할머니는 오빠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줬다. 엄마가 훈육을 할라치면 할머니는 어느새 방문을 열고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소리를 빽 지른다. 나와 오빠가 싸우는 날이면 할머니는 나를 혼낸다. 그렇게 오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싸우는 이유도 묻지 않고, 언제나 나에게 오빠를 못 살게 굴지 말란다. 오빠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할머니는 아침에 오빠 방문을 열어 오빠를 들여다보고, 밤에도 오빠가 집에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주말에 어쩌다 오빠가 집에 있을 때면 어김없이 할머니는 오빠에게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안타깝게도 난 할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오빠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최애 메뉴 볶음밥을 요청할 때가 많았고, 그럼 할머니는 맨날 볶음밥만 먹냐고 투덜투덜하면서도 금세 볶음밥을 만들어 준다. 아, 물론 내 건 따로 없었다. 오빠 몫을 크게 덜고 남은 양, 프라이팬에 조금 남은 볶음밥이 전부다. 그래서 난 지금도 볶음밥을 제일 싫어한다. 먹는 걸로 편애를 하다니…. 아, 서러움이 몰려오는 시점이다.
*사진 : JUSTONECOOKB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