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하루가 건네는 말 없는 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전화도 오지 않고, 특별한 만남도 없고,
기다리던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날.
때로는 하늘도 맑지도 흐리지도 않고,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하루.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 같은 날.
바깥은 평온하지만, 마음은 조금씩
고요의 가장자리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어딘가 외로움의 초입에서
멈춰 섭니다.
그럴 때면 문득 생각합니다.
이 하루가 괜찮은 날인지, 허무한 날인지.
의미 있는 고요인지, 무의미한 공백인지.
요란한 사건도 없고, 기억할 만한
장면도 없고, 그저 무사히 하루를 넘긴 날.
우리는 이런 하루를 자주
'헛보 낸 하루'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조금 달리 바라보면,
그런 하루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아니었을까요.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특별히 어디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 침대에 누워
하루하루를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침을 맞이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그 하루가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서 불행이 잠시 비켜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작지만 귀한 축복입니다.
격렬한 기쁨보다 소중한 고요함입니다.
설렘이나 감동, 또는 환희.
그리고 그런 감정을 안겨주는 일들을 찾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며 감동의 순간을 쌓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모든 날이 그렇게 강렬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날, 그저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적당한 피로를
느끼며 눕는 날. 그런 날이 오히려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지속되는 고요는 우리의 내면을 향하게 합니다. 내면으로 시선이 옮겨가면, 조금씩 삶의 속도가 느려집니다.
그 느림은 처음엔 무료하게 느껴지지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깊고 단단한
울림을 주기도 합니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긴박한 요구로부터 잠시 물러날 수 있는
유예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하루를 허락받고, 우리는 다시 내일을 살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됩니다.
삶은 긴 여정이지만, 그 여정의 대부분은
이런 날들의 연속입니다.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날보다는,
그저 그런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치 바탕화면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화면을 볼 때, 눈에 띄는 것은
아이콘과 창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조용한 하루는 삶의 배경입니다.
그 배경이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빛나는 순간도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어떤 날은 하찮아 보이지만,
사실은 삶을 지탱하는 골격일 수 있습니다.
오늘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도 말이지요.
혹시 지금,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삶이 당신에게
말없이 건네는 쉼표입니다.
그 하루를 억지로 의미 있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도 좋습니다.
의미는 흘러간 시간 속에서, 나중에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곤 하니까요.
가장 많은 감정은, 가장 평범한 날에서
피어납니다.
사랑도, 그리움도, 회한도, 다 그런
조용한 날들 속에서 자랍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없었던 오늘이 어쩌면 내일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조용한 날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침묵을 귀 기울이면, 거기엔 작지만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습니다'라고 말해주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는, 우리가 흔히 찾는 위로보다 훨씬 단단합니다.
지금,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가는 이 하루.
그 하루를 잘 받아들이고 계시다면,
당신은 이미 충분히 잘 살고 계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