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환우들의 부고 소식

by 현루

장기 입원 중에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루게릭병, 파킨슨병, 뇌졸중, 당뇨 합병증 등 각자의 병명을 달고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비슷한 이유로 병원이라는 작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침대에 붙어 있어야 했고, 단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 얼마나 먼 일인지 서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긴 말이 오가지 않아도, 눈빛 하나만으로도 통하는 무언의 교감이 있었다.

그들 중 나는 비교적 상태가 나았다.

좌측 편마비였지만 스스로 거동이 가능했고,

말할 수 있었고, 글을 쓸 수도 있었다.


그들 곁에 있으면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병을 앓고 있지만 고통의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숨을 쉬는 일조차 고통스러워했고, 누군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절망의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몸은 점점 작아지고 표정은 옅어졌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 있었다.

나는 어느 날 퇴원했다.

몸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집에서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은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병원을 떠난 뒤에도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떠난 자리에 그들은 그대로 있었다.
중증 환자라 퇴원은커녕 외출도 어려웠고, 병상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전부였다.


나는 가끔 그들이 생각날 때마다 안부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조금 나아요?”
“어제 경련이 심했어요.”
짧고 간결한 문장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하루를 버텨낸 자의 고단함과 작은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중 한 명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통화하며 “이제 좀 괜찮아질 것 같아요”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 후로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들의 소식은 점점 ‘안부’에서 ‘부고’로 바뀌었다. 어느새 내가 알던 환우들 중엔 나만이 남게 되었다.

문자를 보내도 더 이상 답이 오지 않았다.

전화기 속에 저장된 번호들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읽음’ 표시가 뜨지 않는 그 공백이 점점 커져 갔다. 그 공백이 바로 ‘부재’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들의 죽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허물어졌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생명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그들이 떠나며 내게 남긴 건 슬픔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지금’을 더 아끼게 만들어 주었다.


걷는다는 것, 숨을 쉰다는 것, 입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평범한 일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요즘도 경련과 통증이 심한 날엔 밤잠을 설치곤 한다.

갑자기 환측 다리가 뒤틀리듯 뻣뻣해지고, 통증이 밀려오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병원에 있던 그들이 가끔 떠오른다.


그들도 이 고통을 견디며 하루를 보냈겠지.
그것을 견뎌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위대한 삶을 살았다.


나는 그들이 끝까지 버텨냈던 그 정신을 기억하며 다시 숨을 고른다.
“그래, 나도 아직 살아 있잖아.”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행운이다.


그 행운의 이름이 ‘호흡’이고,

‘한 걸음’이며, ‘하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을 쉬고, 눈을 뜨고,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삶이 주는 축복이다.

병실 창밖으로 햇살이 스며들던 날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우리 모두는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

그 푸른빛 하나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지금은 그들이 그 하늘 어딘가에서 고통 없는 얼굴로 웃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이 땅 위에 남아, 그들의 몫까지 숨을 쉬며 하루를 살아낸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그리고 남은 자는, 떠난 자들의 생을 기억하며 또 하루를 살아간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걷지 못하는 다리로,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마음으로,
그들이 남긴 생의 의미를 되새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