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로 만나는 작가들
강사
아이들과 함께한 돌봄 교실의 일상과 스쳐간 기억, 주변 풍경들을 따뜻하게 전하고 싶습니다.
실바람은 실처럼 가늘고 조용한 바람이지만, 스쳐간 자리엔 어김없이 흔들림이 남습니다.
이 책은 그처럼 사소하지만 오래 남는 기억에 대한 기록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식 탁 위 한 스푼, 엄마의 목소리 등 조용한 풍경들 속에서 삶을 지나며 스쳤던 순간들이 조용히 마음을 두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볍게 읽히지만, 잠시 멈춰 생각하게 되는 글을 좋아하신다면 이 작은 바람의 결을 따라 걸어보셔도 좋겠습니다.
https://brunch.co.kr/@narang7942da/121
《실바람처럼 스치는 기억들》이라는 제목은 그런 기억의 방식에 정확히 닿아 있다.
그리고 09화의 이야기는 그 실바람 같은 기억의 가장 고운 결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떤 날보다 설렘이 컸던 여행지에서
우연처럼 마주한 다섯 쌍의 신혼부부들.
그들과 나눴던 웃음과 반전의 밤,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잔잔한 흔들림.
단순한 유쾌한 추억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층위를 품고 있는 이야기.
편견에 대한 성찰, 인연의 덧없음,
그리고 결혼이라는 관계가 지닌 본질적인 부드러움과 단단함.
11월은 결혼 소식이 가장 많이 들려오는 계절이다.
초대장이 도착하고, 축가가 울리고, 지인들의 단톡방이 축복의 말들로 가득 찰 때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11월,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라는
잔잔한 되뇌임.
그렇게 11월의 문턱에 서면 태국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한 관광버스에 올라타 웃음과 식사를 함께 나눴던 그 다섯 쌍의 신혼부부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공항의 습한 공기, 가이드의 들뜬 목소리,
낯선 옷차림의 관광객들 사이로 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던 다른 커플들.
그들은 단 4박 6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내 삶의 한 페이지를 따뜻하게 채웠던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낯선 음식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나눠 먹고, 잠시의 어색함이 사라지자 금세 농담과 웃음으로 이어지던 그 시간들.
그 만남이 깊이 있는 인연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시절의 마음에서 비롯된 ‘순수함’만큼은
지금도 유효한 감정으로 남아 있다.
신혼여행지에서 생긴 인연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아무것도 보태지 않아도 ‘설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고, 삶의 중요한 순간을 갓 지나온 사람들의 온기가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과 나누었던 짧지만 진한 순간이 이렇게 오래 흔들림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셋째 날 밤.
일정이 끝난 후, 다섯 커플은 자연스럽게 한 숙소에 모여 다과 모임을 가졌다.
벌레소리가 들리는 방콕의 밤공기, 귤껍질 냄새,
낮에 다녀온 사원에서 묻어온 향과 사람들의 체온이 뒤섞인 작고 따뜻한 방.
누군가 준비해 온 과자 봉지가 바스락거릴 때마다
서로에게 건네는 손길은 아직 서툴지만 정겹고 부끄러운 미소로 가득했다.
술이 있지도, 특별한 프로그램이 준비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밤은 자연스럽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첫 진심이 오가는 밤이 되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무슨 일 하세요?”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어쩌면 너무 평범하고 틀에 박힌 질문들이지만
그 질문 속에는 ‘우리 조금 더 알고 싶어요’라는
다정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때의 우리는 모두 20대였고,
모두 새로운 삶의 문턱에 막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그 배경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그 밤의 중심에는 한 남성의 묘한 존재감이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 조금 강한 분위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주도하는 리더십, 그가 있는 자리엔 늘 웃음이 피어났다.
모든 커플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반면, 이야기를 들려준 작가의 남편은 선했고, 조용했고, 담배도 술도 하지 않으며 성실함과 단정함으로 그날의 밤풍경 속에서 잔잔한 ‘부드러운 빛’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 대비는 이야기의 긴장을 설계하는 절묘한 장치였다.
그날의 밤은 그런 ‘편견의 작동 방식’을 아주 친근하고도 유쾌한 방식으로 보여준 밤이었다.
강한 인상의 그 남성이 먼저 제안했다.
“제 직업을 맞춰보세요!”
20대의 혈기와 어수룩함이 깃든 그 시절,
우리는 그가 내뿜던 분위기만으로 직업을 추측해 나갔다.
“군인이신 것 같아요.”
“헬스트레이너 아니세요?”
“술집 사장님 같기도 한데 ”
“운동선수 출신?”
그가 가진 이미지는 힘, 리더십, 다혈질, 남성성 같은 여러 상징과 결합해 있었다.
이후 순서는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넘어갔다.
선한 인상, 단정한 이미지, 큰 키와 고요한 웃음.
“학교 선생님 같으세요.”
“꽃집 하실 것 같아요.”
“은행원 느낌?”
“착실한 공무원!”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단숨에 뒤집었다.
리더십 넘치던 그 남성의 직업은 꽃집 사장님이었다.
부드럽고 선하던 남편의 직업은 술집 사장님이었다.(지금은 술집을 하지 않는다.)
순간적인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숙소 방 안을 가득 채웠던 폭소.
그때의 웃음은 우리가 쌓아 올렸던 편견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쾌감의 웃음이었다.
머쓱함이 한데 섞인 그 웃음은 서로의 민낯을 자연스럽게 들여다보는 첫 번째 진짜 대화의 순간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을 직업이나 외모로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단순하고 가벼운 착각인지를 깨닫게 하는 작고도 강력한 깨달음의 장면이었다.
꽃집 사장님이라는 직업은 다정함과 섬세함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일의 주인은 가장 강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반면 술집을 운영하던 직업은 대개 사람들과 부딪히고 유연한 담대함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하던 이는 세상 누구보다 선한 인상을 지닌 남편이었다.
겉모습은 우리가 가진 수많은 층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진짜 모습은 그가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지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꽃을 파는 남자가 강해 보이는 이유는 어쩌면 꽃을 다루기 위해 그만큼 섬세하고 따뜻한 면모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술집을 운영하는 남자의 선함은 손님을 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진짜 성실함과 책임감에서 나타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09화의 반전은
‘성실함’과 ‘다정함’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아름다움이 겉모습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순간을 너무나 생생하게 드러낸다.
여행 마지막 날, 다섯 쌍은 모두 연락처를 교환했다.
“매년 꼭 만나자”며 서로의 손을 잡고 웃던 그날의 약속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늘 그렇듯 우리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연락이 끊기고, 소식이 멀어지고, 바쁜 일상 속에서
그들의 이름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하지만 희미해진다고 해서 그들이 남긴 흔들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추억을 더 선명하게 가꾸고
그때의 웃음을 오늘의 미소로 다시 피우게 만든다.
결혼기념일을 맞을 때면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날의 폭소와 머쓱함, 그리고 밤공기의 따뜻함이 되살아난다.
이 질문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쯤은 품어봤을 보편적 후회일 것이다.
09화의 구조는 클래식 코미디의 형태를 띤다.
설정 → 긴장 → 반전 → 깨달음.
이 패턴은 사람을 가장 빠르고 쉽게 몰입하게 만든다.
설정:
– 11월, 신혼여행, 다섯 쌍의 만남.
긴장:
– 강한 인상 vs 선한 인상이라는 대비.
– 직업 맞추기 게임.
반전:
– 꽃집 vs 술집의 뒤집힘.
깨달음:
– 겉모습 판단의 허망함, 인연의 의미.
이 4단계 구조는 단순한 웃음 이상의 ‘주제적 각성’을 유도한다.
즉, 감정의 파동이 선형이 아니라 곡선이다.
웃다가, 머쓱하다가, 깨닫는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태국 방콕이라는 공간은 이 이야기의 중요한 장치다.
낯선 땅은 우리가 익숙하게 지니고 있던 ‘편견의 필터’를 약화시킨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한국 사회가 심어놓은 고정관념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편견의 허물어짐’이 일어난다.
꽃집 = 다정함, 섬세함
술집 = 강함, 담대함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이것이 바로 편견의 본질이다.
겉모습은 속을 말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직업은 성격을 규정하지 못한다.
09화는 이 두 가지 주제를
유머와 감정, 평범한 일상의 기억에 녹여낸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말한다.
실바람처럼 스쳐간 기억이
마음에 조용한 흔들림을 남긴다.
실바람은 지나가지만 흔들린 가지는 오래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바로 추억이고, 그 추억이 삶의 문장 하나를 써 내려간다.
09화의 기억들은 그 실바람에 흔들렸던 작은 가지와 같다.
반전의 웃음, 머쓱했던 침묵, 따뜻했던 다섯 커플의 공기, 그리고 그 뒤에 남은 아쉬움까지.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지만
기억은 때로 시간을 거슬러
현재의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