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대화엄사 홍매화

by 현루

25년 전, 그해 3월의 지리산 대화엄사에서 마주한 홍매화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가장 강렬하고 깊은 붉음으로 남아 있다.
화엄사 산문을 지나 데크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면,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의 고요한 자리에 그 나무가 서 있었다.

처음엔 그저 늙은 매화나무로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가자 그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수고 8.2미터, 가슴높이 둘레 1.6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체구.

매화나무(매실나무)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줄기와 가지가 구불구불하게 뒤틀려 하늘을 향해 뻗기도 하고 땅을 향해 처지기도 하며, 독특한 수형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저기 세월의 상처가 깊게 새겨져 있고 이끼가 은은하게 덮여 있었지만, 그 거친 몸통은 오히려 더 강인하고 당당해 보였다.
그 몸에서 피어난 꽃망울들은 작고 단단했다.

아직 만개 전이었지만, 그 색은 보통의 홍매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한 붉음이 거의 검은빛을 띠고 있어, 사람들은 흔히 ‘흑매(黑梅)’라고 불렀다.

배롱나무 꽃을 연상시킬 만큼 짙고 강렬했다.

꽃잎 하나하나가 작았지만 밀도가 매우 높아, 가지 전체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바람이 스치면 꽃잎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그 진한 홍색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향기도 특별했다.

은은하면서도 깊고 그윽했다.

세속에서 맡는 달콤한 꽃향기와는 달리, 약간의 쓴 맛이 배어 있는 듯했다.

오랜 인내와 고독을 견뎌낸 끝에 피어나는, 나무 자체의 숨결 같은 향이었다.

그 향이 각황전의 고즈넉한 기와지붕과 어우러지며 산사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특히 새벽이나 이른 아침, 햇살이 각황전 처마에 스며들 때 홍매화의 붉음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국보 각황전의 웅장함과 국내 최대 규모의 석등이 함께하는 그 공간에서, 홍매화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홍매화는 천연기념물 제485호 ‘구례 화엄사 화엄매’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 300년 이상으로 전해지며, 조선 숙종 28년(1702년) 각황전 중건을 기념해 계파선사가 심었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화엄사 자체가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니, 이 나무는 사찰의 오랜 역사 속에서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온 살아 있는 증인이다.

각황전의 옛 이름 장육전을 따 ‘장육매(丈六梅)’라고도 하고, 각황전 앞이라는 이유로 ‘각황매(覺皇梅)’, 삼불존에서 따 ‘삼불목(三佛木)’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그만큼 화엄사의 심장부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꽃이다.
홍매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색과 형태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기다림의 결정체요, 인고(忍苦)의 살아 있는 상징이다.

다른 매화들이 비교적 일찍 화사하게 피고 지는 데 비해, 이 홍매화는 조금 늦게, 그러나 더 진하고 오래도록 그 붉음을 유지한다.

지리산 자락 해발 약 450미터 위치에서,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보라, 이슬을 견디며 300년을 살아왔다.

꽃이 피는 기간은 짧지만, 그 절정의 순간을 위해 긴 겨울을 인내한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장엄한 서사다.
화엄경의 가르침이 이 나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세계. 작은 검붉은 꽃 한 송이가 모여 가지를 가득 메우고, 그 가지들이 모여 나무 전체를 붉게 물들인다.

다시 그 붉음이 화엄사 경내를, 나아가 지리산의 봄을 장엄하게 물들인다.

한 그루의 홍매화가 천년 사찰의 정신을 대변하고, 사찰이 다시 지리산의 품 안에서 숨을 쉰다. 연기(緣起)의 법칙처럼,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아름다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 앞에 서 있을 때,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졌다. 꽃망울이 조금씩 터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조급함이 스르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직 피지 않은 망울 위에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일 때, 그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함이었다.

하얀 눈이 살짝 내리던 날, 눈 위에 떨어진 몇 송이 붉은 꽃잎은 마치 작은 우주처럼 빛났다.

검붉은 색이 하얀 설경과 대비되며, 화엄경에서 말하는 부처의 세계, 깨달음의 장엄함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듯했다.
홍매화는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말한다. 서두르지 말라. 모든 것은 때가 되면 피어난다. 세속에서는 빨리 빛나고 강렬하게 드러내려 애쓰지만, 진정한 아름다움과 강인함은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오는 이 진한 붉음이다.

상처와 혹독함을 품은 채로도,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그 압도적인 색으로 지리산의 봄을 알린다.

그 붉음은 화려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

300년의 세월이 쌓인 무게가, 오히려 그 꽃을 더 강렬하고 오래 기억되게 만든다.
화엄사에서 마주한 홍매화는 단순한 봄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기다림과 인내를 예찬하는 가장 강렬한 찬가였다.

각황전의 고색창연한 기와 아래, 국보 석등의 웅장함과 함께 서 있는 그 모습은, 천년의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찬미 그 자체였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바닥을 수놓을 때, 그 떨어지는 붉음마저도 아름다웠다.

피고 지는 순간조차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다음 봄을 준비한다.
그 진한 홍색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선명하게 살아 있다.

지리산 대화엄사에서 마주한 그 한 그루 홍매화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피어나는 모든 존재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인내하라. 때가 되면, 네 안의 가장 깊은 붉음이 세상을 물들일 것이다.”


검붉은 꽃잎 하나하나가 품은 깊이, 구불구불한 가지가 그린 수형의 멋, 300년을 넘어 피워내는 그 향기와 색.
화엄사의 고요한 봄을 수놓는 홍매화의 존재는, 천년 사찰의 정신과 지리산의 기운을 한데 모은 살아 있는 예술이다.
고마웠다. 그 영원한 붉은 꽃에게.
화엄사에서 마주한 홍매화의 기억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내 안에 여전히 피어나고 있다.

그 붉음은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