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는다는 것에 대하여

by 안녕 콩코드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말은 한때 나에게 두려움이었다. 내가 놓아버린 그 자리에 공허함만 남을까 봐, 그 빈틈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까 봐, 나는 집착처럼 많은 것들을 붙잡고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 이루지 못한 목표, 지나간 기억들까지. 그것들은 내 삶의 일부였고,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무게였다. 그러나 그 무게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려놓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성숙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깊은 사람의 증거인 줄 알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만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 많이 움켜쥐었다. 말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삭이며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 안에 자꾸만 쌓이는 피로와 허전함이 버티는 힘보다 더 커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무너진 날, 나는 겨우 깨달았다. 놓아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내려놓는다는 건 꼭 무언가를 버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집착하던 마음을 놓아주는 일에 가깝다. 그 마음은 때로 사람을 묶고, 상처를 반복하게 하며,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놓을 줄 모를 때, 우리는 쉴 틈도 없이 자신을 몰아세운다. '더 잘해야 한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지금 놓으면 안 된다'는 말들로 자기 자신을 다그친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자기 마음에서 멀어진다. 나는 그런 나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버텨낸다는 이름으로 나를 방치하고, 성장을 핑계로 감정을 외면했던 시간들. 이제는 그 시간들과 작별하고 싶어졌다.


어느 날 오래된 편지를 정리하다가, 손때 묻은 한 장의 엽서를 발견한 적이 있다. 몇 해 전, 나에게 무척 소중했던 사람이 보낸 것이었다. 그 사람과는 지금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마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그 엽서를 접어 서랍에 넣지 않고, 조용히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맑아졌다. 좋은 기억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그 감정에 매여 있을 이유는 없었다. 지나간 마음은 그저 놓아주기로 했다. 그건 상처를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그 마음이 이제 내 삶을 지배하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장면들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는다. 후회, 미련, 아쉬움, 상처 같은 것들. 그 감정들을 완전히 지우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감정들에 계속 휘둘리는 삶은 분명 피로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감정을 억지로 잊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문다. 슬픔이 오면 잠시 같이 앉아 있고, 아쉬움이 스치면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본다. 감정은 그냥 감정일 뿐,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천천히 내려놓는 연습을 하게 됐다.


내려놓는다는 건 어떤 결심이기도 하다. 내 안의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 지금 여기를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와 맺는 새로운 약속. 그래서 더는 자신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불안해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 다짐은 말처럼 쉽지 않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 내려놓아 본 마음은 안다. 집착에서 벗어난 삶이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넉넉한지를.


어느 늦은 오후, 산책길에 올랐다. 아무 목적 없이 천천히 걸었다. 길가의 꽃이 핀 줄도 몰랐고, 바람이 이렇게 부드러웠던가 싶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주변의 작고 평범한 풍경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를 짓누르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이 조용한 풍경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마음이 비워져야 비로소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여백은 공허함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기대를 내려놓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바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꾸민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계속 자신을 조정하다 보면, 점점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게 된다. 내가 누구의 기대를 사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자주 물어야 한다. 기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끝없이 목이 마르다. 아무리 채워도 부족한 감정. 내려놓는다는 건 그 목마름을 잠시 내려두는 용기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실수하고, 후회하고, 망설인다. 하지만 예전만큼 스스로를 몰아세우지는 않는다. 그건 내려놓는 연습을 조금은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매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내 안의 기준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중이다. 내려놓는다는 건 곧,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다.


무언가를 내려놓으면, 처음에는 어색하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무게가 사라져 몸이 붕 뜨는 느낌이다. 그 빈 공간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바람이 지나고, 빛이 들고, 내 마음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제야 알게 된다. 놓는 것이 곧 잃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도 나는 하루를 정리하며 나에게 묻는다. 오늘 무엇을 놓아도 괜찮을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 조용히 앉아본다. 때론 그저 그 물음 자체가 위로가 된다. 내려놓는다는 건 결국, 더 잘 살아내기 위한 나만의 다짐이다. 그 다짐 안에서 나는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나를 더 잘 돌보기 위해, 오늘도 잠시 손을 놓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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