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난함의 규범

피해 주지 않으려는 욕망이 낳는 새로운 억압

by 콩코드


‘무난해야 한다’는 명령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말과 행동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직장 내 대화, 대학 강의실의 토론, 온라인 커뮤니티의 댓글 등 모든 공간에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일종의 기본 규범처럼 작동한다. 이는 단순한 예의범절을 넘어선 윤리적 요청이며, 민주주의와 평등, 인권 감수성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타인을 존중하려는 윤리가 지나치게 강조될 때, 그것은 곧 ‘무난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변모한다.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줄 수 있는 발언은 금기시되고, 의도치 않은 실수조차 공격의 대상이 된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기보다 침묵하거나, 안전한 말만 반복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피하려는 욕망이 새로운 억압의 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난함의 긍정적 출발: 배려와 존중의 필요성

무난함의 규범은 본래부터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폭력적 언행을 견제하고,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망 역할을 한다. 예컨대, 과거 직장에서 당연시되던 성차별적 농담이나 학교에서 흔히 오가던 지역 비하 표현은 무난함의 감수성이 확산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말의 폭력이 집단 따돌림이나 구조적 차별로 이어진 사례가 많았다. 따라서 무난함의 규범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중요한 진보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의미에서, 무난함은 공존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강박으로 변하는 순간: 자기검열과 침묵

그러나 무난함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공격받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게 된다. 즉, 무난함의 규범은 윤리적 동기보다는 방어적 자기검열로 변질된다.


대학 강의실의 토론 장면을 떠올려 보자. 학생들은 ‘다른 의견’을 내는 순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손을 들기를 주저한다. 직장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비판적 발언은 ‘무례하다’는 낙인을 찍힐 위험이 있어, 다들 무난하고 중립적인 언어만 반복하게 된다. 온라인에서는 상황이 더욱 극단적이다. 댓글 하나가 ‘유해한 발언’으로 지목되면, 순식간에 집단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 사회는 겉보기에는 안전해 보이는 침묵의 공간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 침묵은 갈등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더 깊숙이 감춘다.


새로운 억압의 메커니즘: 무난해야 한다는 의무


무난함의 규범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규율로 제도화될 때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학교나 기업의 다양성 교육 프로그램은 본래 차별을 줄이고 배려를 촉진하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종종 ‘정답만 존재하는 퀴즈’처럼 작동한다. 교육 참가자들은 무엇이 차별인지, 왜 문제가 되는지 깊이 토론하기보다는, ‘옳은 답’을 외워 무난한 태도를 시연한다. 이 과정에서 성찰과 변화는 사라지고, 무난함은 표면적 수행으로 굳어진다.


이처럼 무난함의 규범은 ‘모두를 안전하게 만드는 윤리’라기보다, ‘모두가 동일하게 무난해야 한다는 의무’로 변질된다. 결국 사람들은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동일성의 틀 속에서 무난함을 연기하게 된다.


한국 사회의 맥락: 무난함의 그림자

한국 사회는 집단적 압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난함의 규범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특정 이슈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내면, 곧바로 ‘유해한 발언’으로 낙인찍히기 쉽다. 그 결과, 사람들은 복잡한 의견 대신 안전한 구호만 반복하게 된다.


직장 문화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 갈등을 피하고, 불편한 문제 제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한 업무 분배 문제는 은폐되기 쉽다.


대학 사회에서는 ‘무난한 대화’가 미덕으로 자리 잡으면서, 날카로운 비판과 토론의 전통이 점차 약화된다. 이로 인해 ‘학문적 불편함’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무난함의 규범은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라기보다, 갈등을 억압하고 문제를 덮어버리는 힘으로 작동한다.


갈등의 역설: 불편한 대화의 필요성

무난함은 갈등을 최소화하지만, 때로는 갈등이야말로 사회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논쟁이나 노동 문제를 둘러싼 토론은 불가피하게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회피한다면, 사회는 결코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무난함’과 ‘불편함’ 사이의 긴장을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포용은 상처 없는 대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편하고 충돌적인 대화를 견뎌내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공존을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무난함의 규범을 넘어

무난함은 분명 중요한 윤리적 태도다. 그러나 그것이 강박으로 변할 때, 사회는 자유로운 대화와 창의적 사고를 잃는다. 진정한 공존은 상처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상처와 불편함을 함께 감당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무난함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이 새로운 억압으로 작동하는 순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억압을 넘어, 불편한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의 차이를 마주할 용기를 길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무난함의 규범을 넘어서는, 성숙한 민주적 공존의 길이다.




심층 공부를 위한 이야기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규범이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무겁고 억압적인 규칙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유명한데요. 여기서 ‘서발턴’은 사회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스피박은, 이들이 단지 발언 기회를 빼앗기는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 “그들의 말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다시 침묵을 강요받는 상황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다름을 존중한다”는 선언도 잘못 쓰이면 바로 이런 침묵의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무난함의 규범도 마찬가지로, 다른 목소리를 지우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겠지요.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 글로리아 안살두아입니다. 그녀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자라며, 국경이 단순히 지도 위의 선이 아니라 삶 전체를 흔드는 긴장임을 몸으로 겪었습니다. 《국경Borderlands/La Frontera》에서 안살두아는 경계의 경험을 억압만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언어와 정체성이 태어나는 창조적 공간으로도 바라봅니다. 그녀는 영어와 스페인어, 심지어 ‘스팽글리시(Spanglish)’를 섞어 쓰면서 기존의 문법과 규칙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안살두아가 보여준 건 “무난해야 한다”는 규범 대신, 불편하고 낯선 충돌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 다른 시선을 주는 학자가 사라 아메드입니다. 그녀는 《행복의 약속》이나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혹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과정이 어떻게 또 다른 억압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메드에 따르면 공동체가 늘 웃고 긍정적이고 조화로워야 한다는 문화는 결국 불평등이나 차별 같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즉, 무난함의 규범이 사실은 불평등을 지탱하는 침묵의 기술로 작동한다는 거죠.


주디스 버틀러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그는 ‘규범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인간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지 보여줍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는 규범조차 누가 ‘해를 입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를 정해 버립니다. 이때 무난함의 규범 역시 권력이 만든 규범의 한 얼굴일 수 있음을 드러내 줍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정의’를 단순히 분배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인정(recognition)과 대표(representation)의 차원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사회운동이 때때로 “상처 주지 말자”는 무난한 담론에 갇히면서, 경제적 불평등이나 제도적 배제 같은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프레이저의 관점은, 진짜 정의는 무난한 대화를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도와 구조의 폭력 자체를 바꾸는 데 있음을 환기합니다.


마지막으로 레오 버사니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는 퀴어 이론에서, ‘정상성’이나 ‘무난함’에 대한 집착이 성적 욕망의 해방을 막는다고 보았습니다. 사회가 성적 행위를 ‘건강하고 생산적인 방식’으로만 인정하려는 태도를 비판하며, 때로는 불편하고 비생산적인 욕망 자체가 해방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버사니의 논의는 “무난해야 한다”는 요구가 곧 자기검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정리하면

스피박 → 무난한 규범이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침묵을 강화한다

안살두아 → 경계와 충돌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가능성이 열린다

아메드 → 무난함은 불편한 진실을 억누르는 행복의 정치학

버틀러 → 규범은 보이지 않는 폭력을 낳는다

프레이저 → 무난함을 넘어 구조적 정의로 나아가야 한다

버사니 → 불편한 욕망 속에 해방이 있다


이 여섯 시선을 함께 보면, ‘무난함의 규범’이 어떻게 작동하고 또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를 입체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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