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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 총성, 끝나지 않은 뇌 속의 전쟁

총력전의 유산과 PTSD의 신경 과학: 침묵의 고통을 멈출 평화의 선택

by 콩코드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시간

​우리는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며, 그 폭력의 그림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대 사회의 깊은 무의식까지 드리워져 있습니다. 총알과 폭탄이 멈춘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인간적이었던 폭력의 시대, 즉 '총력전의 시대'가 남긴 파괴적인 유산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총력전은 단순히 군인끼리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모든 자원과 모든 시민을 전쟁에 동원하고, 전선과 후방의 경계를 허물어 모두를 잠재적인 희생자로 만들었습니다. 기관총의 대량 학살부터 핵무기의 등장까지, 인류는 스스로를 가장 효율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발명해왔습니다. 이 거대한 폭력의 경험은 단순히 역사책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흔적은 가장 은밀하고 끈질긴 형태로 개인의 정신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트라우마입니다. 총성이 멎은 후에도 그 끔찍한 기억은 뇌 속에서 '멈추지 않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의 직접적인 생존자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와 공동체 전체에 걸쳐 불안, 해리, 공포의 형태로 트라우마는 대물림됩니다. 마치 유령처럼, 역사의 가장 잔혹했던 순간이 우리의 현재를 침범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인류가 겪은 거대한 폭력의 역사와 그 폭력이 개인의 심리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연결합니다. 우리는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단지 전쟁의 형태를 무의식 속으로 옮겨 놓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그림자의 정체를 똑바로 마주하고, 역사적 통찰과 심리학적 치유를 통해 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시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거대한 폭력의 탄생: '총력전의 시대'가 바꾼 것

​산업화된 학살: 현대 전쟁의 비인간적인 규모

​전쟁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지만, 20세기 초에 등장한 '총력전(Total War)'은 이전의 모든 전쟁과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총력전은 기술 발전이 폭력의 규모를 인간적인 통제 범위를 넘어선 수준으로 확장시킨 결과였습니다. 전쟁이 더 이상 기사도나 영웅주의의 무대가 아니라, 산업화된 학살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기술과 과학의 적극적인 도입이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등장한 기관총은 한 사람이 단 몇 분 만에 수백 명을 살상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독가스'와 같은 화학무기는 적의 전투 의지를 꺾는 것을 넘어, 생물학적인 고통과 공포를 극대화하는 비인간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전쟁의 목표가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넘어 '완전히 제거하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산업화된 학살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량 생산된 폭격기는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불태웠고, 마침내 등장한 핵무기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단 한 번의 폭력으로 문명을 멸망시킬 가능성을 현실화했습니다. 과학 기술이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앞질러 나갔고, 전쟁의 규모는 이제 한 국가의 존립을 넘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비인간적인 규모로 확장되자, 개인이 느끼는 공포와 무력감 역시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이전 시대의 병사는 자신이 대치하는 적을 최소한 인식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총력전 시대의 병사나 민간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폭탄이나 아득히 먼 곳에서 날아온 포탄에 의해 순식간에 존재가 지워집니다. 이는 폭력을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거대한 시스템에 의한 무작위적인 재앙으로 인식하게 만들며, 트라우마의 깊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선과 후방의 붕괴: 모든 시민이 타겟이 되다

​총력전이 전쟁의 판도를 바꾼 두 번째 요소는 전선과 후방의 경계를 완전히 붕괴시킨 것입니다. 나폴레옹 시대까지의 전쟁은 주로 군대 간의 전투였으며, 민간 지역은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총력전은 달랐습니다. 국가의 모든 자원을 전쟁에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후방의 공장, 농장, 심지어 일반 가정까지 전쟁 수행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곧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을 정당화했습니다. 적의 생산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승리의 필수 요소로 간주되면서, 후방 도시에 대한 전략적 폭격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베를린, 도쿄 등 주요 도시들이 대규모 공습으로 초토화되면서, 전쟁의 가장 잔인한 경험은 더 이상 군인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여성, 노인, 아이들까지 전쟁의 가장 직접적인 타겟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논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걸었으니, 적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 전체가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라는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집에서 잠을 자거나 출근하는 일상생활조차 언제든 폭탄에 의해 중단될 수 있다는 위협은, 사회 전체의 기본적인 안전감을 근본부터 뒤흔들었습니다.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확산된 공포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집단적 트라우마로 전환시킵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조차도, 부모나 사회 공동체의 만성적인 불안과 불신을 물려받게 됩니다. 후방의 붕괴는 단지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삶이 언제든 국가적 폭력 시스템에 의해 침해당할 수 있다는 현대인의 깊은 심리적 불안을 낳았습니다.


​역사의 반복: 전쟁이 낳은 증오의 순환

​총력전의 시대가 남긴 가장 파괴적인 유산은 전쟁이 전쟁을 낳는 증오의 순환 고리를 만든 것입니다. 전쟁은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전쟁을 위한 씨앗을 심는 과정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인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물리고 굴욕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조약은 평화의 초석이 되기보다는, 독일 국민들 사이에 복수심이라는 강력한 증오의 감정을 심었고, 이는 결국 20년 뒤 극단적인 전체주의 정권을 낳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러한 패턴은 지속되었습니다. 인류는 핵전쟁이라는 새로운 위협을 앞에 두고 냉전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총력전' 상태로 진입했습니다. 직접적인 대규모 전쟁은 없었지만, 지구촌 곳곳에서 대리전과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이는 지역적인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생성하며 증오의 순환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폭력의 영속성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트라우마는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과거가 현재에 침입하는 현상'입니다. 역사적 증오의 순환은 곧 '해결되지 않은 전쟁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와 다음 분쟁으로 대물림되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폭력적인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무의식은 항상 다음 전쟁, 다음 폭력의 위협에 취약해집니다. 전쟁은 외부의 폭력을 넘어, 내면의 증오와 불신을 영구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며, 이는 개인의 치유와 사회적 평화 모두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 되는 것입니다.


​침묵의 상처: PTSD 트라우마의 심리학

​쉘 쇼크에서 PTSD까지: 트라우마의 역사적 발견

​전쟁이 개인의 정신에 남긴 상처는 오랫동안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총력전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병사들이 겪는 극심한 불안, 떨림, 실어증 같은 증상은 흔히 '신경 쇠약'이나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이 발발하면서, 이 침묵의 상처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폭발했습니다.


​장기간의 포격과 극도의 긴장 속에 놓였던 수많은 병사들이 신체적 상처 없이도 전장에서 기능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학계는 이 현상에 '쉘 쇼크(Shell Shock, 포탄 충격)'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이것이 포탄 폭발의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뇌 손상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점차 폭발음에 노출되지 않은 병사들에게서도 같은 증상이 발견되면서, 그 원인이 극도의 심리적 외상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쉘 쇼크는 전쟁이 신체뿐 아니라 정신을 직접적으로 파괴할 수 있음을 인류에게 처음으로 인식시킨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쉘 쇼크는 여전히 '일시적인 정신적 장애'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후 베트남 전쟁과 같은 현대의 국지전,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폭력 경험을 통해 이 현상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마침내 1980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공식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진단명을 부여했습니다. PTSD는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발생하는 심각한 심리적 장애로 정의되며, 그 증상은 재경험(플래시백), 회피, 과각성이라는 세 가지 핵심 축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명명(Naming) 과정은 전쟁의 상처를 '나약한 개인의 문제'에서 '폭력적인 환경이 낳은 질병'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전환시켰습니다. PTSD의 개념 정립은 총력전 시대가 끝난 후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개인의 정신 속에서 멈추지 않는 시간을 살고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중요한 심리학적 발견이었습니다.


​멈추지 않는 전쟁: 트라우마가 뇌에 남기는 생물학적 흔적

​트라우마가 왜 그토록 끈질기게 개인을 괴롭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PTSD는 단순한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시스템의 영구적인 오작동을 의미하며, 이는 뇌에 뚜렷한 생물학적 흔적을 남깁니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우리 뇌 속에서 '멈추지 않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트라우마를 겪는 순간, 뇌의 편도체(Amygdala)가 과도하게 활성화됩니다. 편도체는 위협을 감지하고 공포 반응을 일으키는 감정의 경보 시스템입니다. 충격적인 경험은 편도체의 경보 시스템을 영구적으로 '켜진 상태(On-State)'로 만듭니다. 그 결과, 일상생활의 작은 소리, 냄새, 시각적 자극조차 전쟁터의 위협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지속적인 과각성(Hyperarousal) 상태를 유발합니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항상 주변을 경계하며, 작은 자극에도 쉽게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 편도체의 과활성화 때문입니다.


​반면, 기억과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해마(Hippocampus)는 위축되거나 기능이 저하됩니다. 해마는 사건의 시간적, 공간적 맥락을 정리하여 '이것은 과거의 일'이라고 라벨을 붙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해마의 기능 저하는 트라우마의 기억이 '과거에 일어난 일'로 저장되지 못하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의 가장 고통스러운 증상인 재경험(Flashback)의 메커니즘입니다.


​즉, 전쟁의 트라우마는 단지 심리적인 고통이 아니라, 생물학적 수준에서 생존 모드가 멈추지 않는 상태입니다. 개인은 물리적으로는 안전한 침대에 누워있지만, 뇌는 여전히 참호 속의 극단적인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학적 이해는 트라우마 생존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높이는 데 필수적입니다.


세대를 넘어 흐르는 고통: 집단 트라우마와 문화적 유산

​총력전과 집단 학살의 폭력은 한 개인의 삶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와 세대를 넘어 대물림됩니다. 이를 '대물림된 트라우마(Intergenerational Trauma)' 또는 '집단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라고 부릅니다. 전쟁의 그림자는 한 가족의 무의식적인 문화적 유산이 되어 다음 세대의 정체성과 심리에 영향을 미칩니다.


​집단 트라우마의 가장 잘 알려진 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자녀들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이들은 부모가 겪었던 공포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만성적인 불안, 감정 회피, 과도한 침묵 등의 무의식적 패턴을 내면화합니다. 생존자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한 고통과 침묵이 자녀 세대에게는 이유 없는 불안감, 세상에 대한 불신, 그리고 낮은 자존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폭력이 언어와 의식을 넘어, 정서적 환경을 통해 전파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대물림은 단지 가정 내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을 겪은 국가나 민족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집단적 서사를 구축합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 경험, 대규모 민간인 학살 등의 역사는 '우리는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존재'라는 집단적 무력감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집단 트라우마는 정치적 갈등, 사회적 불신, 그리고 폭력에 대한 극단적인 감정적 반응으로 이어지며,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어렵게 만듭니다.


​결국, 총력전의 그림자는 개인의 뇌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문화와 가치관 속으로 스며들어 폭력의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의 치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서사를 재구성하고 공동체의 공감 능력을 회복하는 사회적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림자와 맞서기: 역사적 통찰과 심리적 치유 전략

​통찰의 첫걸음: 트라우마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기

​총력전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대에, 개인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첫걸음은 그 고통을 '개인의 실패나 나약함'이 아닌 '거대한 역사와 사회의 산물'로 인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트라우마는 본질적으로 고립감을 낳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질문은 자책과 고립을 심화시키지만, 역사적 통찰은 이 질문을 "나는 이 시대를 살아낸 인류의 보편적인 고통을 겪고 있구나"라는 인식으로 바꿉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인류 공동의 경험이며, 내가 겪은 폭력은 수많은 전쟁과 폭력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비극적인 패턴의 일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심리적 위로와 해방감을 가져다줍니다. 내 고통이 거대한 서사의 일부가 되는 순간, 그 고통은 무의미한 짐이 아니라 '생존을 증명하는 기록'이 됩니다.


​또한, 트라우마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생존자들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당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총력전과 비인간적인 폭력은 개인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이었음을 역사적 사실이 명확히 증명합니다. 개인의 책임을 내려놓고, 그 시스템의 폭력성을 규명하는 것은 곧 트라우마를 극복할 윤리적 서사를 구축하는 중요한 과정이 됩니다.


​공감과 연결: 전쟁의 순환을 끊는 관계성의 힘

​트라우마가 고립을 통해 대물림된다면, 치유는 공감과 연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전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관계성의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친절함을 베푸는 것을 넘어, 과거의 피해와 가해, 그리고 세대 간의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직시하고 진정한 공감의 서사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 트라우마의 악순환은 종종 복수심이나 타자에 대한 영구적인 불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역사를 통찰하여 우리가 모두 폭력적인 시스템의 잠재적 피해자였음을 인정할 때, 타자에 대한 혐오 대신 공동의 인간성에 기반한 공감이 싹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는 전쟁 후 복수 대신 공개적인 서사와 공감을 통해 갈등의 순환을 끊으려 노력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입니다. 가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사회 전체가 공동의 역사로 경청하고 인정하는 과정은 침묵 속에 갇혀 있던 트라우마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연결 의식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나는 혼자가 아니며, 나의 고통은 인정받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이 공감의 회복은 개인의 뇌 속에 멈춰있던 '과각성 상태(경보 시스템)'를 진정시키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안전감을 구축하는 사회적 치유의 핵심 동력이 됩니다.


​평화의 선택: 개인의 회복탄력성과 윤리적 책임

​총력전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단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트라우마를 동력 삼아 폭력 없는 미래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개인의 회복탄력성과 윤리적 책임을 갖는 것입니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란 폭력과 같은 심각한 외상 이후에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에 대한 자율적인 인식 전환을 통해 길러지는 능력입니다. 트라우마 경험을 '파괴적인 재앙'이 아닌,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강인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로 재구성할 때, 개인의 회복탄력성은 극대화됩니다.


​이 회복탄력성은 곧 윤리적 주체성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배웠지만, 동시에 간디의 비폭력이나 만델라의 용서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평화와 인간 존엄성을 선택하는 위대한 힘 또한 배웠습니다. 총력전의 유산에 대한 우리의 최종적인 책임은 '우리가 다음 폭력의 순환을 끊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과거의 고통을 통해 '나는 폭력에 무감각해지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택을 내리고, 우리 사회의 작은 폭력(혐오,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전쟁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거대한 국가적 선언 이전에, 개인의 내면에서 매 순간 이루어지는 자율적인 선택이자 윤리적 책임의 결과입니다.


폭력의 시대를 넘어, 인간으로 살아가기

​우리는 인류의 가장 거대한 폭력인 총력전의 역사와 그 그림자인 트라우마가 우리 시대에 어떻게 잔존하고 있는지 탐구했습니다. 총성이 멎은 후에도 전쟁은 우리의 뇌와 공동체 속에서 멈추지 않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단순히 폭력의 희생자로 남을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트라우마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공감과 연결을 통해 악순환을 끊으려는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야말로 이 긴 전쟁의 시간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치유는 거창한 국가적 프로젝트 이전에, 나의 고통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과 연결하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잔혹함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인간 존엄성을 끊임없이 선택하는 윤리적 주체가 됩니다.


​폭력의 그림자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고통을 통해 미래의 평화를 건설할 수 있는 강력한 회복탄력성을 발견하십시오. 개인의 치유가 곧 사회적 평화의 시작입니다. 이제 총력전의 시대를 넘어, 매 순간 인간다움을 선택하는 주체로 살아가십시오.




주제 심화 추천 도서


​폴 퍼셀. 『제1차 세계대전과 현대 기억』 (The Great War and Modern Memory)

​이 책은 본문의 ​<거대한 폭력의 탄생: '총력전의 시대'가 바꾼 것>, 특히 '쉘 쇼크'가 등장한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문화사적으로 깊이 파고든 고전입니다. 푸셀은 전쟁의 현실이 기존의 낭만적인 서사나 문학적 전통과 어떻게 완전히 단절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참호 속의 비참함, 비인간적인 기술 전쟁, 그리고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공포가 어떻게 당시 군인들의 의식과 이후 서양 문화 전반을 형성했는지 보여줍니다. 이 책은 전쟁의 경험이 개인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단순한 의학적 진단 이전에 문화적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음을 통찰하게 해줍니다.


​2.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이 책은 본문의 2장, 특히 트라우마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현대 심리학 서적입니다. PTSD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저자는 트라우마가 뇌의 구조와 기능(편도체와 해마)을 어떻게 영구적으로 변화시키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트라우마는 '기억'이 아니라 '신체적 감각과 감정의 반복된 재경험'으로 저장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독자는 이를 통해 전쟁의 상처가 왜 '멈추지 않는 현재 진행형'인지 이해하고, 신경 되먹임(Neurofeedback)이나 요가 등 신체를 통한 치유 전략이 왜 효과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3.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이 책은 본문에서 제기된 '전선과 후방의 붕괴' 및 '집단 트라우마의 사회적 인식'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저자는 전쟁과 폭력의 이미지가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소비되고,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관음(觀淫)'하고 '무감각'해지는지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특히 전쟁 사진이나 뉴스가 폭력의 실재를 전달하는 동시에, 오히려 우리를 폭력에 지치게 만들어 공감 능력을 마비시키는 역설적인 과정을 분석합니다. 이 책은 폭력의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 책임, 즉 트라우마를 외면하지 않고 공감하는 법에 대한 성찰을 유도합니다.


​4.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Trauma and Recovery: The Aftermath of Violence–From Domestic Abuse to Political Terror)

​이 책은 폭력의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단계를 구조화하고, 치유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제시합니다. 특히 트라우마를 '외상(Trauma)'과 그 이후의 '회복(Recovery)'이라는 두 축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치유의 핵심이 '안전감 확립, 기억의 재구성, 그리고 타인과의 연결 회복'이라는 세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본문의 3장에서 강조된 역사적 통찰과 관계성의 힘이 개인의 회복 과정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청사진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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