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사람 23화

마음의 방어막을 허물다

리 매킨타이어의 처방전, 불신의 시대에 관계를 구축하는 대화의 윤리학

by 안녕 콩코드
신념이 확고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사실과 증거를 들이대면 출처를 의심하며 논리로 호소하면 논점을 오해한다.
ㅡ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 <예언이 끝났을 때>(1956)


왜 우리는 대화에 실패하는가

ㅡ 불신의 시대: 진실을 잃어버린 대화의 풍경

​오늘날 사회는 마치 양극으로 분리된 자석처럼 격렬하게 서로를 밀어냅니다. 우리에게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와 과학적 증거가 주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진실에 대한 공유된 합의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를 부인하고, 백신 무용론을 주장하며, 심지어 지구가 평평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까지 등장합니다. 이들은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눈을 감고 자신의 신념만을 고수합니다. 왜 우리는 대화에 실패하는가?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는 그의 저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을 통해 이 현상을 단순한 '무지'가 아닌, '과학 부정주의(Science Denial)'라는 체계적이고 위험한 현상으로 진단합니다. 과학 부정주의는 특정 사실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증거와 논리를 알지만, 특정 심리적·사회적 이유로 이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증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멍청이'로 치부하고 외면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외면이야말로 대화의 실패를 자초한다고 경고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배제하는 대신, 그들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고 진실을 향한 공동의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이 에세이는 매킨타이어가 제시하는 '대화의 윤리학'을 탐구하며, 불신의 시대를 극복하고 진실을 향한 끈기를 회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을 모색하는 여정입니다. 대화의 실패는 논리의 영역이 아닌, 감정의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그의 통찰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과학 부정주의의 심리학: 그들은 왜 믿음을 선택하는가

ㅡ 증거보다 정체성: 부정(否定)의 심리적 뿌리

​리 매킨타이어가 밝혀낸 과학 부정주의의 본질은 충격적입니다. 이들은 과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이 공격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방어하는 것입니다. 과학 부정은 지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방어 기제이자 집단 충성의 표현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5가지 부정 전략과 심리적 방어 기제

​과학 부정주의의 논리는 흔히 다섯 가지 전략을 통해 작동하며 대중의 혼란을 야기합니다.

​체리 피킹(Cherry-Picking):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극소수의 데이터나 연구 결과만을 선택적으로 제시하고, 압도적인 주류 증거는 무시합니다. (예: 백신 안전성에 대한 수많은 논문 중 부작용 사례 한두 개만을 침소봉대)

​음모론(Conspiracy Theories): 과학자, 정부, 언론이 모두 거대한 '진실 은폐'에 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제도권 전문가 전체를 불신합니다. 이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로 만들어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됩니다.

​전문가 불신(Expert Distrust): 전문가의 지식이 아닌, 그들의 동기(돈, 명예)를 공격하며 주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립니다. "그들은 거대 제약회사의 돈을 받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와 같은 논리가 대표적입니다.

​불가능한 기준 요구: 주류 과학에는 완벽하고 100% 오류 없는 증거를 요구하는 반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턱없이 낮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잘못된 유추와 논리적 오류: 과학적 개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무관한 현상과 연결하여 논리적 비약을 시도합니다.


부족적 지식론: 우리는 왜 '우리 편'의 이야기를 믿는가

​이러한 전략들이 성공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부족적 지식론(Tribal Epistemology)'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진실 여부는 '무엇이 말해지는가'보다 '누가 말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의 신념이 소속 집단(Tribe)의 가치관과 충돌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집단에 대한 충성을 선택합니다. 만약 기후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소속 공동체(예: 특정 정치 성향, 지역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개인은 사회적 생존을 위해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고 집단의 신념을 따르게 됩니다. 매킨타이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대화의 실패가 논리가 아닌 감정의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핵심 통찰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 가치관, 그리고 소속감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인 셈입니다.

한국 사회의 '부족적 지식론': '빠 현상'의 심리

​매킨타이어의 이 분석은 한국 정치의 '빠 현상'에 그대로 대입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열성적인 지지를 넘어, '과학 부정주의'와 심리적 메커니즘을 공유합니다.

​지지하는 인물에 대한 비판이나 의혹 제기는 곧 '우리 편'을 향한 공격이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됩니다. 논리가 아닌 '우리 지도자가 말했는가'가 유일한 진실의 기준이 되며, 반대 진영의 합리적인 비판이나 중립적인 언론 보도까지도 '가짜뉴스'나 '음모'로 치부됩니다. 이는 과학 부정주의자들이 제도권 과학자들을 불신하는 방식과 소름 돋을 정도로 유사한 부족적 지식론의 극단화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대화의 장벽은 데이터가 아닌 단단한 정서적, 집단적 방어 기제로 형성됩니다.



​매킨타이어의 첫 번째 처방: 감정적 공감의 장벽 넘기

ㅡ 논리를 내려놓고 관계를 구축하라

​매킨타이어의 처방전은 '논쟁'을 멈추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냉철한 논리나 통계 자료를 들이미는 것은 부정주의자에게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져 방어 기제만 강화시킬 뿐입니다.


​비결 1: 인간적으로 존중하라

​대화의 첫 번째 원칙은 '무시하지 않기'입니다. 부정주의자를 '바보'나 '정신병자'로 규정하고 외면하는 순간, 대화는 완전히 단절됩니다. 매킨타이어는 대화의 시작이 상대를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실제로 평평한 지구 콘퍼런스에 직접 참여하여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이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감정적 지점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찾기: 상대의 믿음이 어떤 두려움, 불안, 또는 피해 의식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 백신 공포는 건강에 대한 불안, 기후 부정은 경제적 박탈감에서 비롯될 수 있음). 상대방의 주장을 통해 그들의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경청해야 합니다.

​공통점 찾기: 대화를 시작할 때, 논쟁이 아닌 공통의 가치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끗한 물과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시죠?" 등 공통의 기반 위에서 대화를 시작해야 방어 기제가 낮아집니다.


비결 2: 즉시 설득을 포기하라

​매킨타이어는 대화의 목표가 즉시 설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합니다. 대화의 진정한 목표는 '신뢰 관계 구축'과 상대방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강력한 증거도 소용이 없습니다.

​'비어 있는 잔' 만들기: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성급하게 논파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대신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모순을 스스로 발견하게 유도해야 합니다. 매킨타이어는 이 과정을 통해 대화는 지식의 전달이 아닌, 사고방식의 교정임을 강조합니다.


그가 속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그를 속이는 일이 더 쉽다.
ㅡ 마크 트웨인(Mark Twain, 그의 발언으로 알려져 있음)



​대화의 기술: 과학적 방법론을 질문하라

ㅡ 증거가 아닌, 증거를 얻는 방식에 대한 질문

​부정주의자와의 대화에서 가장 큰 실수는 데이터 대 데이터로 싸우는 것입니다. 매킨타이어는 이 싸움을 피하고, 논쟁의 대상을 '증거 자체'가 아닌 '증거를 얻는 방식(과학적 방법론)'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전략 1: 논쟁의 규칙을 질문하라

​대화가 표류하지 않도록 상대방의 전제와 결론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과학의 근본을 질문해야 합니다. "당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 증거가 나온다면, 당신은 생각을 바꿀 의향이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은 상대방이 자신들의 논리가 갖는 책임감을 깨닫게 합니다.

​증거의 '재현 가능성' 강조: 과학은 '재현 가능성'이 핵심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주류 과학은 다른 연구자에 의해 언제든 검증될 수 있지만, 음모론이나 부정주의자들의 주장은 보통 특정 개인의 경험이나 비공개 자료에 의존합니다. 이 지점을 질문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전략 2: 모순 드러내기(소크라테스식 질문법)

​매킨타이어는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을 추천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주장을 겉으로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그 주장이 현실에서 논리적으로 어디에서 모순되는지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기술입니다.

​평평한 지구의 예: "만약 지구가 평평하다면, 뉴욕에서 시드니까지 비행하는 비행기가 왜 평평한 지도 상에서 가장 짧은 직선 경로를 택하지 않고, 아프리카나 중동을 지나는 포물선 경로를 택할까요? 그들이 연료를 낭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대가 가진 믿음이 현실의 복잡한 시스템과 충돌하는 지점을 찾아 질문)

​전문가의 정의 재정의: 전문가의 정의를 '학위'가 아닌 '재현 가능하고 객관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재정의하도록 유도합니다. 전문가는 '누구'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로 판단해야 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결정적 통찰: '나'를 드러내는 환경 조성

​대화의 핵심은 상대방이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과 집단 소속감을 잃는 고통스러운 경험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매킨타이어는 공격 대신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 상대방이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리 매킨타이어의 처방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거대한 울림

​리 매킨타이어의 책은 '평평한 지구'나 '백신 부정' 같은 특정 과학 이슈를 넘어, '진실'과 '합의'의 기반이 무너진 현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과 처방을 제공합니다. 이 작은 책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거대하며 시급합니다.

글로벌 차원의 의의: 불신의 팬데믹

​공유된 진실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위협: 매킨타이어는 과학 부정주의를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닌, 민주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민주주의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사실에 기반하여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기후 변화 같은 명백한 과학적 사실조차 부인된다면 사회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대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책은 진실을 위해 끈기 있게 대화하려는 노력 자체가 시민의 윤리적 의무임을 역설합니다.

​SNS 시대의 부족주의 심화: 전 세계적으로 소셜 미디어가 확산되면서 필터 버블(Filter Bubble)과 에코 챔버(Echo Chamber)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증거가 아닌 '우리 부족(Tribe)'의 의견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받습니다. 매킨타이어의 조언은 이러한 디지털 부족주의 환경에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며 관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유일한 해법을 제시합니다.


한국 사회의 시사점: 정체성 정치의 해독제

​'정치적 빠 현상'에 대한 해독제: 한국 정치의 '빠 현상'은 매킨타이어가 지적한 '부족적 지식론'의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진영에 대한 공격을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해제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이 책은 논쟁에서 승리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의 감정적 두려움과 불안에 공감하는 '관계 중심의 대화'를 통해 대화의 물꼬를 트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합리적 비판 문화의 복원: 한국 사회는 '이성적 논리'보다 '집단적 충성'이 우선시될 때가 많습니다. 매킨타이어의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은 상대방의 논리적 모순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모순을 깨닫게 유도하는 합리적 비판의 기술입니다. 이 책은 한국의 정치와 사회 토론 문화를 '비난'에서 '질문'으로 전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대화는 왜 포기할 수 없는 윤리인가

ㅡ 진실을 향한 끈기: 대화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법

​우리는 지금, 진실을 향한 끈기라는 시민적 윤리를 회복해야 할 기로에 서 있습니다.


​리 매킨타이어는 모든 사람이 설득되지는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인정합니다. 일부 부정주의자들은 이미 극단적인 심리적 장벽에 갇혀 있으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화를 포기할 수 없는 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인(Bystanders)' 때문입니다.


​대화의 궁극적 목표: 주변인에게 말을 걸다

​부정론자와의 끈기 있는 대화는 그 사람 자체를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그 논쟁을 지켜보는 회의적인 사람들과 방관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대화는 침묵을 깨고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진실은 침묵을 통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진실에 대한 헌신'의 윤리

​매킨타이어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진실에 대한 헌신'입니다. 민주주의는 공유된 사실과 객관적인 진실을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만약 기후 변화나 과학적 사실을 둘러싼 합의가 무너진다면, 정책 결정은 불가능해지고, 공동체는 와해됩니다. 따라서 과학 부정주의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민주적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협입니다.


​매킨타이어의 처방전은 결국 '정답 찾기'가 아닌, 서로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논쟁이 아닌 대화를 통해 진실을 향해 함께 나아가려는 태도에 대한 호소입니다. 불신의 시대에 진실을 위해 끈기 있게 대화하려는 노력 자체가 바로 시민의 윤리적 의무임을 역설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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