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알파벳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규정하려 애씁니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회사원이다," "나는 부모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나 '본질'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 모든 규정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이 방정식은 삶의 근본을 가장 간결하고 충격적으로 요약합니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여기서 B는 Birth(탄생)이고, D는 Death(죽음)입니다. 그렇다면 C는 무엇일까요? 바로 Choice(선택)입니다. 우리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정해진 경계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이라는 이름의 숙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엄청난 자유를 선언하는 동시에, 무거운 공포를 안겨줍니다. 우리의 삶이 정해진 목적지 없이 오직 선택으로만 채워진다면, 그 선택의 연속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이 글은 사르트르의 통찰을 따라 선택의 본질과 그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을 탐구합니다.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입니다. 이는 우리가 특정 목적이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돌이나 의자는 이미 그 목적(본질)이 정해진 채(앉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백지 상태로(실존) 세상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무수한 선택(C)만이 우리의 정체성(본질)을 규정합니다.
예시 (C의 연속):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것인가(C), 회사를 그만둘 것인가(C),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C),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C)...
이 모든 'C'의 순간들이 모여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운명이나 환경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선택한 행위의 총합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경이로움인 동시에, '선택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공포입니다.
우리가 오직 선택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도 100%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르트르에게 '자유'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회피하는 사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부모님 때문에 이 길을 택해야 했어." (B와 D 사이의 C를 부인하고 환경 탓으로 돌림)
책임지는 사람: "나는 이 상황을 선택했(거나 바꾸지 않기로 선택했)다. 이 결과는 내가 만든 것이다." (C를 수용하고 다음 선택을 준비함)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의 불행이나 실패를 환경(B)이나 운명(D)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내가 행복해지는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를 매 순간 유지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책임의 수용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우리 삶의 모든 통제권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궁극적인 해방이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C의 본질은 '연속성'입니다.
우리가 어제 내린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지만, 사르트르는 어제의 선택에 영원히 구속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어제 '회사원'이기로 선택했더라도, 오늘 아침에는 다시 '회사원'을 계속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 될지 다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코 한 번의 대단한 결정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직업, 관계, 가치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것을 계속하기로 선택하고 있다"는 능동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바로 이 매일 아침의 재선택을 인지하는 것이, 굴레처럼 느껴지는 책임감을 삶을 설계하는 가장 큰 권한으로 바꾸는 힘입니다.
인생은 B(탄생)와 D(죽음) 사이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C(선택)의 향연입니다. 우리는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선택은 무겁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선택의 자유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권리입니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거운 자유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신이 내리는 그 다음 C를 통해 완성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