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보라 Oct 30. 2022

브라카 검사(유전검사) 결과를 듣다

괜찮다 괜찮다 마음으로 열심히 되뇌지만, 희한하게 병원 가는 날 아침엔 목이 붓는다. 그냥 붓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목에 가래가 걸려있는 느낌. 헛기침을 해서 떼내 봐야 소용없다. 행주로 아무리 닦아도 싱크대 상판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젖은 김조각처럼 계속 목구멍에 들러붙는다.(알고 보니 스트레스로 인한 역류성 후두염이었다.)     


오늘은 다학제 진료실에서 브라카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다. 여기서 변이 유전자가 발견되면, 유방암 수술 외에 또 다른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난소 절제 같은)     


나는 우리 가문 최초의 유방암 환자라 '유전'을 상상해 본 적은 없는데, 병원에 입원했을 때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시어머님도 유방암 환자였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 항암 없이 부분 절제만 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셨다. 항호르몬 제(타목시펜)는 5년 드시고 지금은 치료가 다 끝난 상태. 어머님은 치료받는 동안 큰 부작용이 없었다고 했다. 수술, 방사선 치료, 타목시펜 5년 복용. 이 과정이 그닥 힘들지 않으셨다고. 지난 5년 동안 해외, 국내 가릴 것 없이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니시고 열 시간이 넘는 비행도 끄떡없으셨던 걸 보면 어머님 말씀이 맞다. 오히려 젊은 자식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움직이셨다.      


일상생활이 수월했기에 굳이 암에 걸린 걸 알리지 않았다고 하셨다. 어머님이 유방암 환자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수술할 때 보호자로 갔던 시누이 한 명뿐이었다.      


자식 모르게 병원 다니셨을 어머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원래 강하고 씩씩한 분이라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성품인 건 알지만, 그래도 어머님이 안쓰러웠다. 아들, 며느리가 어쩜 이리 까맣게 몰랐을까. 죄송했다. 그러면서 내 아들이 생각났다. 엄마도 암 환자, 할머니도 암 환자. 이런 이력을 물려주고 싶진 않았는데. 아들한테도 미안했다.      

  

병원에 도착했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왔더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스타벅스에 갔다. 코 끝에 들어오는 커피 향과 사람들의 소음이 새삼스럽다. 코로나 이후 실내 공공장소를 기피했다. 암 진단받은 후엔 더 조심했다. 감염 위험이 있는 곳은 가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2022년 들어 처음으로 카페에 왔다.    

 

2022년에 처음으로 와 본 카페

말차 라테로 이리 행복해질 수 있다니. 코로나는, 암은, 평소에 당연히 누리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새삼 감사히 여길 기회를 준다.  


진료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조금 있으면 브라카 검사 결과를 듣는다.     


'여기서 안젤리나 졸리처럼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면 또 다른 예방적 수술에 대해 상담을 하겠지? 병원 나온 지 열흘 만에 수술 얘기라니. 듣고 싶지 않군...'     


안 좋은 생각이 목에 붙은 가래처럼 머리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이 돌연변이 유전자 때문에 파혼당한 예비 신부가 있다던데, 제발 카더라 통신이길. 안 그러면 너무 슬프잖아.      


다학제 진료실


다학제 진료실에 들어갔다.(여러 진료과 의사가 동시에 모여 환자와 상담하는 걸 '다학제 진료'라고 한다.) 6인용 식탁의 두 배쯤 돼 보이는 원형 테이블에 산부인과, 소화기내과 등 각 분야 전공의 네 분이 앉아 있었다. 펜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중요한 말은 놓치지 않고 기록해야지.      


하지만 일 분 만에 펜을 내려놨다. 선생님 네 분이 랩 배틀을 하듯 말을 쏟아냈다. 저렇게 빨리 말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다다다 쉼표도 없이 얘기했다. 적을 수도 없었지만 적을 것도 없었다.      


"검사 결과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유전'이 아니다. 그 말에 아들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돌연변이 유전자는 없었다. 유방암을 빼면, 그 외 건강 수치도 양호했다.(평소 건강관리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특이점이 없으니 의사 선생님 입장에서 조언해 줄 게 없었다. '정상입니다, 이상 없습니다'를 네 번 듣고 오 분 만에 진료가 끝났다.     

 

다학제 진료에서 '이상 없음'으로 결론 나자, 그 뒤에 있던 유전 상담도 빨리 끝났다. 특별한 건강 문제는 없으니, 근력 운동만 신경 쓰라고 했다.   

     

'이상 없습니다,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나 듣고 싶은 말이었나. 병원만 오면 안 좋은 소식을 달고 나가 마음이 무거웠는데,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들었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오긴 하는구나.     

오늘 하루,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브라카 검사 결과로 인해 감사가 넘치는 하루가 되었다.      


결과를 듣기 전까지 얼마나 긴장했는지 한낮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날씨였는데 몸이 서늘했다.     

내일 드디어 유방암 수술 결과를 듣는다. 내 속에 있던 종양이 어떤 놈이었는지 정확히 알게 되겠지. 거기에 따라 치료 방향이 잡힐 거고. 만약 항암을 하면, 머리카락은 다 빠지겠지? 가발도 사야 하나? 눈썹 문신도 미리 하라던데...      


이전 19화 퇴원, 집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